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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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었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현실 전체를 의심하도록 만든 그 경험이 다른 경험으로 대체되었을까? 어쩌면 그 경험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그저 꿈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기억의 예외적인 성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집을 다녀온 뒤 며칠 동안 괴로워한 기억만 남아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          - '역행' 중에서, p.78


표제작인 <토끼들의 섬>에서는 스스로를 발명가로 여기는 한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무인도를 여행하겠다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직접 만든 통나무배를 강에 띄운다.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돌아다니다 작은 섬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도시 생활에 신물이 났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우선 일주일에 두어번 섬에서 잠을 자며 몇 주간 주변을 관찰했고, 그곳이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인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문제는 새들이었다. 새들은 자고 번식하고 죽기 위해 섬을 찾아왔고, 덕분에 섬 전체가 새 둥지와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섬에 토끼를 풀어 새를 쫓아내자고 생각한다. 아주 하얗고 긴 털과 빨간 눈을 가지고 있는 하얀 토끼 스무 마리를 섬에 풀어놓았고,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그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표제작인 <토끼들의 섬>을 비롯해서 이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독특하다. 귀에서 발이 돋아나기 시작한 한 여인의 이야기, 이별을 앞둔 연인의 기묘한 여행기, 정신병을 앓고 있는 형의 말대로 악마의 관점에서 도시를 바라보고자 결심한 건축학도,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호텔 옆방의 미스터리, 신혼여행지에서 돌연 자신이 벌레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 휴대전화에 뜬 점술가의 광고 메시지가 이상하게도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걸 알게 된 여자의 사연 등등 평범한 일상 속에서 뭔가 하나가 어긋나고 틀어져버린 곳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다. 다가갈수록 미로처럼 뒤틀리는 거리, 말라빠진 음식과 벌레가 들러붙은 욕실 등 선연하게 보여지는 이미지들이 자아내는 분위기 또한 작가가 그려내는 환상과 현실 그 어딘가에 있는 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어느 목요일, 차에 앉아 있던 그는 별관의 어느 방 커튼 사이로 비치는 큰형의 그림자를 보았다. 말라붙은 야자수 잎이 발코니에 달려 있었다. 큰형은 방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구석에 몰아넣고 위협하거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불이 꺼졌다. 다시 한번 온몸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그의 뼈와 근육은 머리가 상황을 논리적이면서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건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연속 되풀이해서 일어났다.               - '지옥의 건축학을 위한 기록' 중에서, p.152~153


총 열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은 스페인 문단을 이끌어갈 새로운 목소리라 평가받는 작가 엘비라 나바로의 소설집이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표작인 이 작품은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은 걸작”이라 극찬받으며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환상과 악몽을 오가는 이야기들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가득한데, 각각의 이야기가 짧은 만큼 더욱 임팩트가 강하다. 단편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라 낯설고, 불편하다는 점 또한 작가가 그려내는 서사에 가산점이 되어 준다. 엘비라 나바로는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환상 괴담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 


이 작품은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오르며 '프란츠 카프카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문학적 성취를 이어받아 유럽 사회가 당면한 불안을 이야기하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최고 등용문으로 꼽히는 하엔 소설상을 비롯, 유수의 신인상과 작품상을 연달아 수상하기도 했는데, 현대 스페인 문학의 새로운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책 표지의 어두운 밤의 이미지와 그 속에 보랏빛과 핑크빛으로 선연하게 물든 컬러감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근사하게 재현시켜주고 있다. 자, 스페인의 젊은 작가가 그려내는 환상과 악몽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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