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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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어쩌면 음식과도 비슷하다. 모르는 음식은 영원히 그 맛을 알 수 없지만, 한번 맛을 본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맛은 단지 입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다. 미각이 첫 번째긴 하지만 후각이나 시각 또한 중요하고, 더 나아가 그 못잖게 중요한 게 또 있다. 바로 촉각이다. 면이 퍼져 있다면 더 이상 면이 아니고, 질긴 고기는 이미 고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촉각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그 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전성기는 그 찰나다. 모든 것이 아주 잠깐 동안 딱딱 맞아떨어지던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긴 어둠 속에서 아직 먹지 못한 음식을 기다리거나, 단 한 번 맛본 그 최고의 맛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p.43


을지로 세운상가에 터 잡은 청년 예술가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현실을 벗어난다. 어릴 적 여자아이였던 휴일은 엄마가 집을 떠나자 남자가 되어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하고, 엘은 알록달록한 곰 젤리 하리보를 한 움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잔인하게 곰을 통째로 먹고 있다고 하리보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태솔로인 도도는 언제나 관심사가 연애이고, 끊임없이 유턴하는 버릇이 있는 휴일의 아버지는 또 집을 떠나 해외에서 새로운 일을 벌이려는 중이고, 태유의 아버지는 동물원 우리에서 이십 년을 지내며 핑크스핑크스로 근무하고 있다. 


가진 건 감각뿐인 젊은 예술가들이 바라는 건 작업실과 작업을 할 수 있는 돈뿐이지만, 그게 너무 어렵다. 지원금을 받으면 수월해지지만 내야 할 서류와 사유와 영수증을 정리하다 보면 정작 작업할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서 휴일은 '약하디약한 우리에겐 둘만의 우주가 필요하다'는 말로 사랑에 기대뿐이다. 동료들도 예술을 그만두고 공무원이 되거나 카페를 개업하는 등 각자의 살길을 찾아 나선다. 





우리의 멜랑콜리는 따뜻하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재 같은 우울이 눈과 진흙처럼 쌓인 것은 재의 마을 때문이 아니라, 카페 수영장 때문이 아니라, 하리보 때문이 아니라, 핑크 스핑크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사람이라서다. 그리고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생 그 자체. 지분이 없어도 발이 떠 있어도 결국은 나의 삶이니까. 눈 위에 눈이 쌓인다. 흩날리면서 눈은 눈과 만난다. 눈 위의 눈, 눈 위에 눈, 눈에 눈. 그리고 진흙. 아름다운 혼돈, 선과 선, 악과 악의 애매한 경계들. 그것들이 쌓이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묵묵히 해나갈 것이다. 작업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p.241~242


이지 작가는 ‘하루키적 경묘함’을 갖췄다는 찬사를 받으며 데뷔했는데, 이번 작품 역시 상실을 다루는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남편이 게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나간 엄마, 커피 유통업을 하겠다며 해외로 떠난 아빠.... 불행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휴일은 어둡거나, 절망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만 보인다.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가뿐하게 밟고 넘어설 수 있는 청춘 특유의 무신경함과 담백함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점점 논리나 이성으로 따질 수 없는 영역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 어디선가에서 멈춰 서서 독자들을 똑바로 쳐다본다. 우리의 현실 또한 종종 길을 잃어 버리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부서지는 가운데 서로에게 기대고, 위로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오랜 잡지기자 생활을 비롯하여 각종 직업을 거친 끝에 소설가로 데뷔한 이력을 가진 작가답게 문장들이 특히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서사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많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만큼 경쾌하고, 톡톡 튀는 문장들로 가득한 작품이다. ‘한 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등단 포부처럼 이 작품 역시 단 몇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기 보다는, 소설의 분위기를 통해 작품 속 세계를 느껴본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무언가 철거되고 또 새로 지어지다 돌연 취소되는 등 금세 사라질 것으로 가득한 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냉정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만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서 오는 담백한 위로를 보여준다. 감각적인 문장과 독특한 필치에서 오는 경쾌함으로 '요즘 젊은것들'의 영혼을 느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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