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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우화 - 4천년 전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우화
얄와츠 우랄 지음, 에르도안 오울테킨 그림, 이희수 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옛날 옛적 수메르에는
사자도 하이에나도 없었답니다.
늑대도, 들개도 살지 않아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걱정할 일도,
켕게르족의 적도 없었답니다.
수메르 시인
우화는 구전이라는 전승 방법을 통해 동물들을 등장시켜 사람들에게 도덕적 교훈과 고결한 삶을 영위하는 원칙을 가르치는 인류 초기의 이야기 방식이다. 우화의 전통이 이솝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최초의 우화는 이솝이 아니라 4천년 전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수메르 우화는 이솝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수메르의 필경사들이 설형문자로 쓴 역사상 최초의 동물 이야기이자, 점토판이라고 불리는 흙으로 만든 책에 옮겨져 있다. 수메르인들의 초기 문학 텍스트가 들어 있는 점토판은 현재 튀르키예 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책은 튀르키예 아동문학의 권위자인 얄와츠 우랄이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재구성한 46편의 ‘수메르 우화’를 감각적인 그림과 함께 엮은 것이다.
특히나 일러스트들이 인상적인데, 수메르의 조형물과 동물 형상에서 찾은 수백 개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연구해 그 시대를 반영하는 스타일로 그려냈고, 점토판의 느낌을 살리고자 연한 갈색 계열의 컬러로 채색했다. 우화 한 편마다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각각 덧붙여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이 읽기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몇 날 며칠 목구멍으로 고기 한 점 넣지 못한 상태였던 사자가 수풀 속에서 누워 잠들어 있다. 배고 고프고, 피곤한 데다 잠도 잘 자지 못해 짜증이 났다. 그런 사자 앞에 피골이 상접한 어미 염소가 나타난다. 사자의 점심이 굴러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염소는 말한다. 뼈와 가죽뿐인 자신을 잡아먹어봐야 뭐 하겠냐고, 배를 채울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만약 자신을 잡아먹지 않으면, 개나 양도 없이 아무도 지키지 않는 살찐 양들이 있는 목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이다. 그 양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때 자신을 잡아먹으라는 염소의 말에 사자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지만 고민한다. 결국 '살찐 양들'이라는 말에 넘어간 사자는 염소를 따라 목장에 도착한다. 높은 울타리가 튼튼하게 쳐진 곳이었다. 배고파 미칠 지경이었던 사자는 어서 가서 그 살찐 양들을 잡아오라고 말했고, 울타리를 훌쩍 넘어 들어간 염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자의 큰 덩치로는 높이 뛰어오를 수 없었던 울타리였다. '꾀 많은 염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침착한 기지를 발휘해 사자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자와 염소, 여우와 늑대, 멧돼지와 코끼리, 민물 거북이, 당나귀, 고양이, 들쥐 등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60여 마리의 동물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오만한 여우와 이기적인 늑대, 꾀 많은 염소, 투덜이 하이에나, 게으른 물소, 분수를 모르는 개 등 인간들의 어리석은 면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짧은 이야기들 속에 각각의 교훈이 담겨 있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이솝 우화 속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껴지는 것들도 있는데, 이는 이솝 또한 그곳에서 수메르 필경사들이 남긴 점토판을 읽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수메르의 동물 이야기들이 이솝 우화에 영감을 준 것이다. 책 속 동물들은 인간 삶의 명과 암을 비틀어 풍자하고 있다. 저자는 간략한 요약과 교훈으로 이루어진 이솝 우화의 딱딱한 방식을 벗어나 재미있는 시적 산문 방식으로 우화를 풀어냈는데, 그래서 더욱 잘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솝 탄생 천년 전에 시작된 우화의 기원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