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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괴이 ㅣ 비채 미스터리 앤솔러지
조영주 외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평점 :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카페에서 일할 때였다. 누군가 내 귓가에 '정말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기분. 영감이 아니라 누군가 진짜로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그 이야기를 문장으로 옮길 뿐이라는 생각...... 예전에는 이런 게 다 내 기분 탓이라고, 원래 글에 홀리면 그렇게 되는 것이라 여겼지만 이 녹음은 뭔가 이상했다. 나는 이게 기분 탓인가 확인하기 위해 엄마에게 의견을 물었다. 엄마는 "또 헛소리를 한다"고 하면서도 일단 녹음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너 원래 혼잣말 많이 하잖아. 한 말 또 하고 또 하잖아.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 조영주, '영감' 중에서, p.39
작가인 '나'는 데뷔전 카페에서 10년간 일한 전업 바리스타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가 커피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고, 오늘도 한 출판사의 편집자의 소개로 실력자가 운영한다는 카페를 소개 받는다. 고풍스러운 목조풍의 인테리어에 중년 여성 바리스타가 있는, 추리소설의 한 장면 같은 카페였다. 카페의 사장이 추리소설 덕후라는데, 카페의 한쪽 벽면에 동서고금을 망라한 추리소설이 모두 모여있었다. 이후 종종 나는 그 카페에 들렀지만, 5년이 넘도록 사장을 만나지는 못했다. 가끔 바리스타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게 다였고, 그 기이한 문답은 언젠가부터 쪽지로 변했다. 그들은 쪽지를 통해 소설의 감상문을 주고 받기도 했고, 질문에 답변을 해주기도 했으며, 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마침 나는 작가 여섯 명과 함께 '무진 십자가 사건'을 주제로 작품을 쓰고 있는 참이었다. 카페 사장은 그에게 '당시 사건 자료 등을 보며 비슷한 경험'을 해보면 어떨까 라고 답변을 했고, 나는 카페를 빠져 나오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고 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자신이 긴급 수술을 받은 상태라는 걸 알게 된다. 병원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그는 영감을 받아 풀리지 않던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녹음기를 통해 구술을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다음 날 녹음한 내용을 확인해보니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이중으로 들리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여러 번 확인할수록 두 목소리가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걸 그대로 따라 읊는 듯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대체 영감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십자가를 등지고 숲속을 바라보았다. 장 씨가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숲이다. 무진의 그곳과는 달리 사방이 꽉 막힌, 절대 고독의 빈터, 장 씨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는 무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다.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 소리가 작은 새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삼키며 어둑어둑해지는 공간을 깨웠다. 정신이 들었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던 모양이다. 거센 바람이 산을 흔들었다. 태풍이 접근하고 있다. 때가 오고 있다. 나는 잡목들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그 공간에서 나왔다. - 김세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중에서, p.235
오래 전 문경의 폐석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 그대로 한 남자가 발견되었다.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졌고, 양손과 양발에 굵은 대못이 박혀 있는 잔인한 모습에 목격자들은 누군가에게 잔인하게 처형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신 근처에 십자가 설계도와 실행 계획서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이를 근거로 자살로 판단한다. 하지만 여러 정황과 현장의 증거물들을 통해 전문가들은 타살이거나, 죽음을 도와준 조력자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봤다. 이 사건은 여러 의문만 남긴 채 미스터리로 남았고,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여전히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그 사건을 소재로 미스터리 앤솔러지가 탄생했다.
여섯 명의 소설가가 실제 사건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해 단편소설을 써냈다. 조영주, 박상민, 전건우, 주원규, 김세화, 차무진 작가는 호러, 추리, 미스터리, SF 등 다채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통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실제 이 소설을 쓰며 으스스한 경험을 한 작가도 있었고, 실제 사건이 가져온 파장보다는 사건 당사자의 시선에서 내적 탐색을 시도한 작가도 있었다. 남자가 죽기 직전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해 고민한 작가도 있었고, 그는 왜 하필 그런 죽음을 선택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도 있었다. 한 가지 사건을 각기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고, 다른 장르로 풀어낸다는 점부터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여섯 소설가의 목소리로 재해석한 ‘십자가 사건’의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