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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평점 :
그곳의 대지는 이 세상에 속한 것 같지 않았네. 우리는 정복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모습에는 익숙했지만, 그곳, 그곳에서는 괴물 같은 존재가 자유로이 풀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 그곳은 이 세상에 속한 것 같지 않았고, 그곳의 인간들은...... 그래, 그들은 비인간적인 존재가 아니었어. 글쎄, 그게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었지. 그들이 비인간적인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야. 그 의심은 천천히 찾아왔어. 그들은 울부짖고 뛰어오르고 빙빙 돌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는데, 우리를 전율케 한 것은 그들이, 우리처럼, 인간성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 이 사납고 격정적인 소란이 우리와 먼 친척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네. p.86
조지프 콘래드 사망 100주기를 맞아 새롭게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Heart of Darkness’다. 기존에는 지금까지 ‘암흑의 핵심’, ‘어둠의 심연’, ‘어둠의 속’ 등 각기 다른 뉘앙스의 제목으로 번역돼왔다. 황유원 번역가는 ‘어둠의 심장’이라고 제목을 번역했다. ‘Heart of Darkness’는 소설의 무대로 짐작되는 ‘콩고 내륙의 빽빽한 초목’을 가리키는 동시에, ‘인간의 광기’, 즉 물리적 영역과 심리적 영역을 모두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에 ‘어둠의 심연’보다는 ‘어둠의 심장’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번역뿐만 아니라 작품과 연관된 다양한 텍스트를 부록으로 수록해 가장 충실하고 완전한 판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 이번 책은, 가장 최신의 《어둠의 심장》이자 소설의 명성만 들었던 사람들, 난해하다는 소문에 읽기를 망설였던 사람들, 어둡지만 심장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기꺼이 나아갈 준비가 된 사람들을 위한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템스강에 정박한 쌍돛대 유람선 넬리호에서 몇 사람이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가 진 뒤, 강물 위로 땅거미가 내리고 강기슭을 따라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말로 선장이 자신의 과거 경험담에 대해 말을 꺼낸다. 그는 인도양, 태평양, 중국해를 6년 정도 실컷 경험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지도를 아주 좋아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에서 무역을 하는 커다란 회사에 대해 알게 되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무역회사 소속으로 콩고 강을 오가는 증기선 선장이 된다. 떠나기 전 지도의 정중앙에 표시된 치명적일 만큼 매력적인 강을 보고 설레이는 것도 잠깐, 관련 서류 작업을 하면서 직원들 사이에서 뭔가 불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음모에, 뭔가 상당히 잘못된 일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거다. 하지만 불길한 암시에도 불구하고 콩고라는 미지의 장소에 대한 가한 호기심으로 항해를 시작한다.
만일 궁극적 지혜가 그런 형태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인생은 우리 중 몇몇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수수께끼인 셈이지. 나는 하마터면 판결을 내릴 마지막 기회를 얻을 뻔했지만, 어쩌면 내게 아무런 할 말도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굴욕감을 느꼈네. 커츠가 비범한 사람이었다고 내가 단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세. 그에게는 무언가 할 말이 있었거든. 그는 그것을 말했네. 내 스스로 삶의 가장자리 너머를 슬쩍 들여다본 이후로, 촛불의 불꽃은 볼 수 없어도 온 우주를 아우를 만큼 광대하고 어둠 속에서 뛰는 모든 심장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지닌 의미를 나는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p.167~168
말로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커츠'라는 전설적인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커츠는 원주민에게 막대한 양의 교역품을 끌어내어 그 지역 무역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로 무성한 소문을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말로가 커츠를 만나기 위해 가장 어둡고 야만적인 지역으로 향하는 여정이 이 작품의 주요 서사가 된다. 먼저 사업장으로 가기 위해 콩고 강 어귀에 도착해 말로가 마주한 것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흑인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합법적인 기간제 계약이라는 명목하에 병들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전까지 혹사당해온 것이다. 모든 것이 엉망인 그곳에서 말로는 오지에 가면 커츠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커츠가 비범한 인물이며, 특별한 존재라고 말한다. 긴 여정을 거쳐 어둠의 심장부에서 말로는 커츠와 만나게 되는데... 과연 커츠는 무성한 소문과 명성에 걸맞는 인물이었을까? 커츠와 말로의 만남은 이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작품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조지프 콘래드는 자신이 직접 콩고에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로드 짐>과 <어둠의 심장>이라는 작품을 썼다. 그는 유럽의 식민주의가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던 콩고에서 목격한 사건들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수백만의 아프리카인들을 죽이면서 착취했던 당시 유럽인들을 소재로 작품을 쓰기에 이른 것이다. 극중 콩고에 도착한 말로가 발견한 것은 문명인의 어두운 내면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물욕때문에 영혼마저 잃어버리고, 야만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인간의 본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충격적이고, 끔찍하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무엇이 문명이며, 무엇이 야만인지, 어느 순간 둘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빽빽한 초목의 벽으로 둘러싸인 정글 사이를 지나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며 각종 장애물들을 피해 항해해야 하는 힘든 여정처럼 콘래드의 문장들도 밀림처럼 빽빽하고, 숨 막히는 거대한 숲과 닮아 있다. 분명 행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표 하나 없는 글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흑의 정글처럼 묵직하고, 수수께끼로 가득한 미로처럼 모호한 부분 또한 이 작품의 매력을 훼손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지에 초목이 만발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왕이나 다름없던 태초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여행, 공기가 뜨끈하고 빽빽하고 묵직하고 둔탁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숲을 지나 식물과 물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세상의 압도적인 현실이 빚어내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