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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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러는 사이 야스코가 먼저 사과하지 않겠나, 라고 배짱을 부린 것도 사실이다. 설마 그 이듬해에 '남은 수명은 앞으로 8년'이라는 선고를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내 수명'이 아니라 '세상의 수명'이었으니, 실로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 '종말의 바보' 중에서, p.17


우유부단한 후지오는 어떤 일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오히려 더 괴로웠다. 매번 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민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보다 두 살 위인 아내 미사키는 그와 성격이 정반대이다. 그런데 이번에 어쩐 일인지 아내가 후지오에게 결정권을 쥐어 줬다. 부부는 오랫 동안 아이가 생기길 바래왔었는데, 드디어 아이가 생긴 것이다. 임신 8주라는 진단을 받고 아내는 낳을지 말지, 후지오에게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찾아온 새 생명, 당연히 기뻐해야 할텐데 왜 후지오는 고민하는 걸까. 이유는 3년 뒤에 소행성 충돌로 세상이 끝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3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4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미치는 세 가지 목표를 정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책을 전부 읽는다, 죽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막 두 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세 번째 목표는 아직 달성 중이다. 아버지의 서재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들은 어림잡아 3천 권 정도였을 것이다. 하루에 한두 권, 마음이 내키면 세 권, 그런 식으로 계속 읽어오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대부분의 학교가 종말 소동 이후 문을 닫고, 방송도 끊겼고, 아파트에 남아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미치는 하루하루를 책 읽는 데 소비하며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지냈다. 음식 재료를 사러 식료품 가게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도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진짜 해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두 번째 목표를 완성하고 나선 슈퍼마켓에서 오랜 만에 동창을 만나게 된다. 동창이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새로운 목표가 생기게 되는데, 앞으로 3년이면 끝나버릴 세상 속에서 미치의 새로운 목표는 이뤄질 수 있을까. 





"소행성이 떨어질 때, 죽을 때는 어떤 느낌일까요?" 나는 무심결에 물어보았다. 쓰치야 씨는 운동장에 핀 아지랑이라도 보는 표정으로 "눈 깜짝할 새 아닐까?"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겠지만, 분명 눈 깜짝할 새에 의식이 사라질 테지. 아마 죽었다는 것도 모를 거야."

"그건 싫네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싫어?"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는 게 두려워요. 예를 들면 아, 죽었다, 이런 생각도 못 하게 되겠죠? 그건 무섭고 싫습니다."             - '심해의 지주' 중에서, p.345~346


앞으로 몇 년 후에 지구에 운석이 떨어져서 세상이 멸망한다면 어떨까. 누구나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엉망이 되지 않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종말의 바보> 원작 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8년 후에 소행성이 충돌하여 지구가 멸망한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은 지 5년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행성 뉴스를 들었을 당시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물건을 훔치는 온갖 범죄를 저질렀고, 그렇게 폭동, 방화, 살인, 강도, 사기 등 지상의 모든 곳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치안을 지키기 위해 가차 없이 거친 수단을 취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완만한게나마 범죄는 줄어들고, 거리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대혼란에 빠졌던 세상도 이제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지구의 멸망까지 남은 것은 단 3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일상을 견뎌내야 할까. 


이야기는 지방 도시 센다이의 아파트 힐즈 타운의 살아남은 주민들의 하루하루를 통해 보여진다.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여덟 편의 이야기는 담담하지만, 뭉클한 감동을 전해 준다. 어떤 비참한 상황에서라도,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면 삶의 의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만약 내일 죽는다면 인생이 바뀔 것인가, 혹은 몇 년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작품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의 끝이 정해져 있다면, 대체 무슨 일을 해야 사는 게 의미있을까. 어떻게든 남아 있는 나날을 버텨내려면 뭘 해야 할까. 소행성이 떨어질 때 죽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사라지는 거라면 조금 위로가 될까. 이사카 고타로는 대재앙이라는 소재를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삶의 의미를 묻기 위해 죽음을 눈앞에 가져온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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