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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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무시하게 돈이 많은 미국의 한 생명공학 회사가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아니다, 죽지 않는 게 아니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종이 된다지, 아마. 뭐든 가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는데, 내 생각엔 그 정도면 신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신이야. 아무튼 그 회사가 세계 최고의 게임 회사와 손을 잡고 신들이 거처할 세상을 만들었다 이거야.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고, 병든 자도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영원한 천국."                 p.106


가상세계에서는 뭐든 하고 싶은 일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으며, 도덕적 부담을 짊어질 필요도 없다. 불량하고 불건정한 환상을 원한다면 술과 약의 세계가 소망을 이뤄주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사람은 심해든, 에베레스트든, 태양이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영웅이든 악당이든, 혹은 동물로도 살아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인 '롤라'는 거대 네트워크이자 빅 테이터이며 통합 플랫폼이다. 해상은 롤라의 세계 속에서 1인칭 가상 극장 ‘드림시어터’를 만드는 설계자이다. 이야기는 해상에게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드림시어터를 만들어 달라는 한 남자의 기이한 의뢰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의뢰자인 경주는 도수치료사로 이름을 날리다 의료 사고로 인해 병원에서 잘리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동생인 승주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점점 상태가 나빠졌다. 정신과에 끌고 가 치료를 시작했지만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참다 참다 아버지의 기일에 폭발한 경주는 승주에게 차라리 나가 죽으라고 모진 말을 내뱉고 만다. 그 길로 집을 나간 동생은 두 달 동안 연락이 없었고, 결국 노숙자 촌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실의에 빠진 경주는 급여가 높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노숙자 재활시설 삼애원의 보안요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그곳은 이상기후로 인해 유빙이 떠내려 오는 외딴 곳이었다. 경주는 그곳에서 노숙자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어떤 기업이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고, 그 실험 대상으로 노숙자들에게 무작위 티켓이 발부되었다는 거였다. 그 티켓을 얻기 위해 노숙자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경주는 동생의 죽음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자신과 함께 보안요원으로 입사한 동기 제이가 비밀리에 뭔가를 찾아 다니다, 차가운 눈밭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발견되는데...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은 바로 '해상'이었고, 경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상은 그의 룸메이트 제이가 자신의 제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쪽 세상에서 살 때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고 생각했어요. 사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살다 보면 나아질 거라 믿었고. 결국 그런 믿음은 허상이었어요. 내가 왜 사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 거죠."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요."

내가 되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p.390


이야기는 현재 롤라의 해상, 그리고 과거 삼애원의 경주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밀도를 높여 나간다. 악명 높은 암초 지대이자 유빙으로 둘러싸인 세계는 온갖 암투와 모략이 판이 치는 수상한 곳이다. 마치 '복마전'처럼 끊임없이 비밀과 욕망이 뒤엉켜 나쁜 일들이 벌어진다. 해상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제이는 삼애원의 제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장소는 카이로의 사막이다. 폭설과 한파로 점철된 차가운 세계와 뜨겁고 건조한 모래 사막의 세계라는 장소의 대비처럼 두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다 어느 한 지점에서 중첩된다. 그리고 특유의 힘있는 문장으로 이끌어 가던 서사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제이가 롤라의 초기 개발자였고, 해상에게 롤라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을 뺀 나머지, 한 개체의 고유한 의식과 무의식, 본성, 반사작용, 감각이나 신경 회로 같은 것들을 모두 정보 형태로 네트워크에 업로드 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 세계의 삶에 얼마만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자신의 정신과 몸을 완벽하게 홀로그램으로 구현해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와 똑같은 가상현실처럼 만들어냈다고 해도 말이다. 


국내 작가 중에 스릴러 장르를 이렇게 잘 쓰는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번 감탄하며 읽게 되는 정유정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완전한 행복>에 이은 욕망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악의 3부작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에서 인간의 ‘악’과 대면하고 그것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던 작가는 이제 인간의 ‘욕망’과 정면 승부한다. 전작에서 '자기애의 늪에 빠진 나르시시스트, 즉 병리적인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삶을 휘두르기 시작할 때 발현되는 일상의 악'을 그렸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성의 가장 먼 미래, 현실 너머로 질주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탐구한다. 특히나 이번 소설을 위해 홋카이도의 아바시리와 이집트의 바하리야 사막을 직접 오가며, 거대한 유빙에 포위된 어둠의 바다와 황량하고 메마른 대지의 한복판에 글을 썼다고 하는데... 덕분에 장소에 대한 실감 나는 묘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불멸의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야 이야기의 소재로 아주 고전적인 것이지만, 정유정 작가는 인간의 본성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가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심연을 들여다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몰입감을 안겨주는 힘도 여전하다. 역시 정유정은, 정유정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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