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 남자가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새뮤얼의 집, 새뮤얼의 카펫 위에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게 될까? 새뮤얼은 테이블에 대고 손가락 장단을 치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게 되려나. 그치지 않는 이 움직임이 계속 집 안을 채우게 될까. 20년 넘게 새뮤얼 혼자 고독을 지키던 이 집에서 이런 움직임이 계속되려나. 작은 오두막을 점령하며 바닥과 벽으로 스며든 이 숨결, 이 맥박, 이 젊음, 이 생명. 새뮤얼은 숨이 막히고 내면의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p.25



스스로의 선택으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는 일흔 살 노인 새뮤얼. 그는 23년 동안 등대지기로 일해 오며 홀로 섬에 살고 있다. 2주마다 공급선이 오는 것 외에는 전혀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작은 섬에 의식을 잃은 한 남자가 파도에 실려 온다. 처음에는 시신이라고 생각했다. 23년 동안 그가 발견한 시신은 모두 서른두 구였고, 처음에는 공무원들이 섬에 와서 조사를 하기도 했지만 점차 관심이 없어졌고, 대부분 새뮤얼이 스스로 처리해야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한 남자는 살아 있는 것이 분명했고, 그로 인해 오랜 세월 공고하게 쌓아온 새뮤얼의 고립과 평화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가 표류해 온 날 아침부터 나흘 동안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난민임이 분명한 그 남자를 먹이고 보살펴주는 과정은 새뮤얼로 하여금 잊고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게 만든다. 새뮤얼의 나라는 식민지 시대, 부패정권,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동지들과 연대해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2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었다. 독재자가 실각한 뒤 자유의 몸이 되어 등대지기에 자원했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캐런 제닝스는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을 통해 아프리카의 격동적인 역사를 들여다본다.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 가장 무서웠던 건 마구 구르고 뒤채고 휘도는 파도였다. 고립보다도, 길들지 않는 땅보다도, 다른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럼에도 새뮤얼은 싫은 내색 없이 파도를, 그리고 섬을 둘러싼 거대한 바다를 경외하려 애썼다. 그가 계속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돌담을 쌓은 건 아마도 물살의 공격에서 땅과 자신을 지켜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해안을 흐트러뜨리고 어지럽히는 파도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목은 얼마든지 관리할 수 있고 모든 걸 숨 막히게 만든 질식초도 다룰 수 있었다. 그가 길들이고 싶은 것은 바다였다.                 p. 254~255



작가인 캐런 제닝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나 현재는 브라질로 이주해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브라질에서 집필되었는데,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증하고 팬데믹이 선언되며 도시가 봉쇄되었던 당시에 쓰였다. 브라질에 사는 외국인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며, 외딴섬에서 홀로 살아가는 새뮤얼만큼이나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글을 썼다고 작가는 말한다. 일흔 살 노인의 지독한 고독을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었던 배경으로 상당히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이 작품은 2021 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는데, '비범하고 웅장하며 매혹적'이라는 심사평을 받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임에도 밀도 있는 이야기가 꽉 차 있어 숨죽이며 읽게 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한데, 과거가 현재를 어떻게 잠식하는지, 폭력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을 낳는지...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었다. 특히나 연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방인은 얼마나 쉽게 배척되는가에 대한 사유가 탁월해 나와는 다른 존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나와 생김새가 다르고,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서는 나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어 준 작품이었다. 폭력과 야만의 역사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런 작품을 바로 지금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식민지 시대 이후 아프리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 이야기는 아픈 역사를 지닌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로 읽힐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