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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평점 :
자기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명료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머리카락이 뱀이건 아니건, 우리는 모두 너무도 복잡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런 모습인지, 어떤 삶의 굴곡을 겪었는지 힘들이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올림포스 산의 이편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왜 허니 케이크보다 무화과 케이크가 좋은지, 왜 그의 친구가 아닌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왜 한밤중에 우는지, 혹은 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우는지, 왜 아무 이유 없이 우는지.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p.77
신의 분노로 머리카락이 뱀으로 바뀌는 형벌을 받게 된 메두사는 외딴 섬에서 언니 둘과 사 년 째 숨어 살고 있다. 물결처럼 길게 늘어졌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없고 형형색색의 뱀들의 요람이 되어 버렸으니, 누구 앞에도 나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외지고 아름다웠으며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인 섬은 메두사와 언니들이 선택한 영원한 유배지이기도 했다. 영원처럼 긴 시간을 보내며 미쳐버릴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점차 외로움에 익숙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동굴과 어둠에 숨어 사는 반쪽짜리 삶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잃은 젊은 남자가 섬에 도착한다. 외로움에 지친 메두사는 자신의 모습은 바위 뒤에서 감춘 채, 그에게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의 비밀을 나누고 점점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였고, 그가 섬에 온 목적이 메두사의 목을 베는 거라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메두사는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그가 감당할 수 있을 지 두렵고, 아테나의 저주로 그가 화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라면 우리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겠지만, 제시 버튼에 의해 현대적 관점으로 다시 쓰인 메두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 넘으면서 펼쳐진다.
신들이 내게서 앗아간 행복과 기적을 되찾을 실낱같은 희망을 그에게서 본 걸까? 마른 가지는 불꽃이 있어야 불이 붙는다. 이 불은 페르세우스 혼자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내면을 외면하라고 배웠다. 나 자신의 불을, 누군가가 들어주길 원하는 나의 목소리를 외면하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되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빛이 있어 세상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만큼, 빛이 있어 이제 더는 숨을 곳도 없었다. 그를 향한 강렬한 감정이 두려웠고, 그 감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두려웠다. p.142
머리에 뱀이 득시글거리는 괴물, 눈빛만으로 숨통을 끊는 살인자, 자애로운 신에게 저주받은 자, 메두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혹은 괴물로 지칭되는 메두사는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돌로 변해버리게 하기에 두려움의 존재처럼 여겨진다. 미모가 출중해 포세이돈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사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뱀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렸다. 하지만 사실 메두사는 무고한 피해자였고, 그녀를 억지로 갖고 싶어 한 포세이돈은 가해자임에도 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메두사가 남성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죄를 범했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사실 성폭력 피해자가 도리어 괴물로 변해야만 하는 상황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가해자인 남성이 아니라 피해자인 여성이 벌을 받게 되는 상황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니 말이다.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로 변해 홀로 고통을 감내해야했던 메두사의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또한 바로 그러한 기시감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남성 중심의 서사를 뒤집어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신화를 재해석한다. 남성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죄를 범했다고, 그 다음에는 남성을 무력화하는 괴물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 되어 버린 메두사의 시점을 통해 다시 쓰여지는 이 이야기는 여성의 불안과 처벌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다. 남성에 의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제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신화를 제대로 뒤집어 보는 것이다.
이 도발적인 이야기를 한층 더 살려 주는 것은 강렬한 터치와 색감이 인상적인 풀컬러 일러스트들이다. <신비한 동물 사전> 등을 작업한 세계적 일러스트레이터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은 메두사의 감정과 신화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니어처리스트>, <뮤즈>, <컨페션>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제시 버튼은 여성의 삶과 내면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작가답게 메두사라는 캐릭터를 섬세하고 독창적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장 현대적인 감각으로 쓰인 메두사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