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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평점 :
책과 좀 더 각별히 가까운 사람들, 그러니까 퀴퀴한 서점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거나 익숙한 제목이 적힌 책등을 몰래, 다정히 쓰다듬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새 책에 나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것은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책장에서 피어오르는 먼지와 목제 펄프 냄새를 읽는 행위다. 고급 양장본의 냄새일 수도 있고, 얇디얇은 종이와 흐릿한 흑백 인쇄의 냄새일 수도 있고, 담배 피우는 노인의 집에서 50년간 읽힌 적이 없는 책의 냄새일 수도 있다. 싸구려 스릴이나 치열한 학문, 문학적 무게감, 혹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의 냄새가 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지금껏 어느 책에서도 맡은 적 없는 냄새가 났다. p.37
재뉴어리는 일곱 살 때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던,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발견한다. 재뉴어리는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푸른 페인트에 손바닥을 대고 문을 밀자, 경첩이 신음하며 열린다. 뭔가 마법 같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당연히 문 반대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외로운 들판에서 어디로도 이저지지 않는 문 옆에 앉아 있을 때 재뉴어리는 그 동안 읽어보지 않았던, 전혀 다른 이야기가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실화, 굳게 믿기만 한다면 기어들어 갈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 재뉴어리는 수첩을 꺼내 연필로 이야기를 쓴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자, 세상에서 무언가가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국적인 향이 뒤섞인 바람이 불었고, 망설이다 다시 문을 열었더니 은빛 바다로 둘러싸인 높은 절벽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경험은 강렬했고, 돌아와서 어른들에게 말했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후 재뉴어리는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위한 여행을 꿈꾸게 되었지만 현실은 고고학 협회 회장인 로크 씨의 대저택에서 이런 저런 제약들로 둘러싸인 채 지내는 게 고작이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돌아가셨고, 아빠는 로크 씨에게 고용되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로크 씨가 원하는 대로 교육 받고, 행동하며 상상력과 모험심은 묻어둔 채 지낸다. 그러다 열일곱 살 생일에 보물 상자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일만 개의 문>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고, 묻어두었던 불가능한 꿈들이 다시 스물스물 피어나기 시작한다. 식료품점 아들이자 재뉴어리의 유일한 친구인 새뮤얼, 그리고 아빠가 말동무를 하라고 보내준 제인, 새뮤얼이 선물로 데려온 반려견 배드까지... 이들은 새로운 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함께 하게 된다.
"너의 이 문들은 닫혀 있어야 한다, 유감이지만."
'아니, 그렇지 않아.'
세상은 결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닫히고 숨 막히고 안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저택과 같아야 한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여름비가 들이치고, 옷장은 마법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다락에는 비밀 보물 상자가 있어야 한다. 로크 씨와 협회는 한 세기 동안 미친 듯이 저택 주위를 돌아다니며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막고 문을 잠갔다.
닫힌 문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p.504~505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지 않았을까. 아주 특별한 문을 통과해 뜻밖의 장소로 갈 수 있다는 마법 같은 상상 말이다. '나니아 연대기' 속 옷장 문도 좋고, 낡고 허름한 오두막의 문, 혹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문도 좋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고, 장소를 넘나 들며 모험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여기와 저기, 우리와 그들, 평범과 마법이 나뉘는 분기점이 열리면서 두 세계 간에 교류가 일어나는 것이다.
1901년의 재뉴어리와 그녀가 읽는 책 <일만 개의 문> 속 1866년에 태어난 애들레이드는 모두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는 여성들이다.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애들레이드는 당시 다른 여성들처럼 주어진 환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대신, 농장 건초지에 있는 낡은 오두막에서 문을 통해 나온 남자 줄리언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다. 재뉴어리의 모험에 동행하며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제인 역시 당시의 시대상에서 벗어나 여전사처럼 남성에게 맞서고 모험을 즐기는 멋진 여성이다. 재뉴어리 역시 사사건건 모험을 방해하며 현실에 순응하고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고고학 협회의 로크와 헤이브마이어라는 어른들에 맞서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찾아 나선다. 여성과 유색 인종이 전혀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서 모험을 즐기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로맨스와 어드벤처, 그리고 판타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만들어 졌다. 앨릭스 E. 해로우는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에 최종 후보작에 올랐고, 아마존 편집자가 뽑은 최고의 판타지에 선정되기도 했다. 마음 한 가운데에 랜턴처럼 밝기 빛나는 즐겁고 신비한 비밀을 품고 있다면, 매일의 일상을 견디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 그게 바로 우리가 판타지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새로운 판타지의 고전이 될지도 모를, 놀라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