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혁명 그리고 퀘스트 - 하드SF 단편선
위래 외 지음 / 구픽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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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어에 뛰어들자마자 하랑과 포니아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우주의 진짜 모습이었다. 토야와 지구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과 물질을 경험했다. 작은 것과 큰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하나의 특이점 속으로 섞여 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하랑과 모니아는 우주복 너머로 전해지는 서로의 감각에 의존해 어떻게든 의식을 붙잡았다. 입은 있었지만 소리는 지르지 못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모든 경이와 경외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많은 걸 기억 속에 담았다.             - 해도연, '거대한 화구' 중에서, p.151


책과 서점에 관한 SF, 팬데믹 시대의 로맨스, 귀신날 호러, 고전 SF오마주, 판소리 SF 등 다양한 장르소설 앤솔러지를 선보이고 있는 구픽의 앤솔러지 신작이다. 이번에는 '하드SF 단편선'으로 여섯 명의 장르 소설 작가들이 각자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하드 SF'라 하면 과학 이론이나 개념 자체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장르이지만, 이 책은 그러한 편견을 가뿐하게 넘어 선다. 하드 SF 장르를 그리 어렵게만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현실에 기반한 소프트 SF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요즘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과학적 개연성이 우선시되거나, 과학 기술에 대한 내용이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는 작품들을 만나게 되니 굉장히 신선했고, 읽는 내내 지적 자극으로 머리를 쓰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이야기들이었다.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무게를 두고, 탄탄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다루고 있는 정보의 양이 많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거나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할까요, 에티올? 조금만 더 가면 엔딩이에요."

그 손을 꼭 붙잡자 세상이 세피아 빛으로 물들었다. 살아생전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구나, 이 뒤의 일은 분명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야.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이야기야. 끝난 게임의 후속작을 위해 억지로 급조된 이야기가 아니라,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이야기야. 그 당연한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작게 입을 열어, 앞서 나아가는 프리베에게만 간신히 들리도록, 속삭였다.

"고마웠어, 프리베. 끝까지."        

"저야말로 고마웠어요, 에티올!"              - 이산화, '마법사 에티올의 트루 엔딩 퀘스트' 중에서, p.377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은 남세오 작가의 <벨의 고리>였다. 수록된 여섯 편의 작품 중에 분량은 가장 짧은 데 비해 과학적 정보의 양은 가장 많았는데, 그럼에도 아주 흥미진진했다. 노벨상 시상식 도중에 일어난 작은 소동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날 노벨물리학상은 양자역학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그 수상자들을 정면으로 공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시위 피켓을 들고 누군가 나타난 것이다. 그 문장은 양자역학의 확률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의 대표적인 말이었다. 시상식을 영상으로 지켜보던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 일하는 길상우는 그 문구 아래 적혀 있던 숫자와 피켓을 들고 있던 사람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상상도 못했던 위험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양자 얽힘 현상이니, 양자적 특성이 어쩌니 하는 물리학 이야기가 잔뜩 등장하지만 예상외로 술술 잘 읽혔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웬만한 스릴러 못지 않게 긴장감까지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위래 작가의 <마젠타 C. 세레스의 사랑과 혁명>, 해도연 작가의 <거대한 화구>, 이하진 작가의 <지오의 의지>, 최의택 작가의 <아니디우스 레푼도>, 이산화 작가의 <마법사 에티올의 트루 엔딩 퀘스트>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수 세기 후 우주 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도 있고, 현재 시점으로 스위스 입자물리연구소를 배경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도 있으며, 떠돌이 행성인들이 2만 년 동안 얼음 속에 묻혀 있던 우주선을 발견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도 있다. 제3차 대전 이후 지구를 말살하려는 달 지배 시스템도 등장하며, 인간의 두려움 속에 탄생한 기후조절 생명체와 게임 속 등장인물에게도 생물학적 원리가 작동한다는 흥미로운 가설도 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매력을 선보이는 작품들이라 어느 작품을 골라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엄밀하면서도 재미있는 SF 소설'이 궁금하다면, 하드 SF의 현대적 부활을 꿈꾸는 여섯 작가의 도전을 함께 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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