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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그 이전의 삶. 그 이후의 삶.
클라라 이전의 모든 것은 생기 없고, 텅 비고, 임시방편처럼 여겨졌다. 클라라 이후는 나를 전율시키고 겁먹게 했다. 방울뱀들의 골짜기 너머 물바다의 신기루처럼.
나 클라라예요. 그 한마디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으며, 그녀를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돌아갈 수 있던 단 한 가지였다. 기민하고 따스하며 신랄하고 위험한 그녀를.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 이 한마디에서 퍼져 나왔다. p.13
크리스마스 이브, 홀로 참석한 파티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크리스마스트리 뒤편의 창가에 서 있다. 그때 누군가 한 손을 불쑥 내밀고 말한다. "나 클라라예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사실처럼 퍼뜩 내뱉은 그 말 한마디로 인해 그날 밤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나는 클라라와 함께 테라스로 가 뉴욕의 밤 풍경을 보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녀에 대해 더 알고, 더 듣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후 나는 매일 밤 클라라를 만나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고, 음악을 듣는다. 이 소설은 두 사람이 만난 날부터 딱 여드레 밤 동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구나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알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을 추측해보고, 지난 과거의 상처를 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상대를 향한 갈망과 희열에 이르기까지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며 마음속을 휘젓는 시기이니 말이다. 안드레 애치먼은 더없이 섬세한 문장으로 그 순간의 감정들과 어지러운 생각들을 그려내고 있다. 한쪽이 다가서려 하면 다른 한쪽이 한 걸음 물러서는, 좀처럼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진척이 느린,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온갖 생각의 소용돌이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다. 안드레 애치먼은 〈롱리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까. 불처럼 타올라 첫 눈에 반하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말이다.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고민하고, 상대가 하지도 않은 행동을 미리 짐작하고 걱정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사랑에 빠져 있는 내내 말이다.
나는 클라라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맨 첫 번째 밤부터 마지막 밤까지, 심술과 자존심으로, 또 그 사이에는, 상당량의 두려움과 경고로 지배되었던 한편, 가장 중요해야 마땅했던 그 하나의 단어는 말없이 남아 있으리라는 선고를 받은 단어였다가는 이윽고 그것 역시도 단단하고, 빙하 같고, 또 바위같이 되어버렸던 일을 생각했다. 나는 그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지 않았는가? 눈에다가는, 밤에다가는, 공원의 동상에다가는, 내 베개에다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단어를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클라라,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놓쳐버렸기 때문에, 내가 당신과 영원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상실 역시도 틀림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에. p.683
클라라를 만나고 다음 날, 나는 하루 종일 그녀 생각을 한다. 눈 속에서 헤어진 일부터 코트를 입었다가 입지 않은 일, 악수와 함께 작별 인사를 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배웅해 준 일, 그녀가 빌렸던 우산을 수위에게 건네준 일,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던 일... 나는 완전히 넋을 잃은 채 온종일을 보낸다. 두 사람은 함께 영화를 보고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담요처럼 덮은 눈을 보며 걷는다. 나는 그 산책이 절대 끝나지 않기를 소원한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 새 눈 내리는 뉴욕의 밤거리를 걷는 두 남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특별히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이지만, 전혀 지루할 새가 없었던 것은 그들의 세상에 독자인 내가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되었다가 그를 안달 나게 만든 여자가 되었다가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여드레 밤을 보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파인드 미>, <하버드 스퀘어> 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안드레 애치먼의 신작이다. 그 동안 만나왔던 작품들에 비해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인데, 768페이지 내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내면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탐구하는 소설이다. 안드레 애치먼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의 설레임과 불안한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해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선뜻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두 사람의 아주 특별한 연애소설로 완성시켰다. 특유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인해 이들과 함께 하는 여덟 번의 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보편적 감정을 그려내고 있어 공감하고,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도 이렇게 뛰어난 몰입감을 안겨준다는 것이 안드레 애치먼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나는 사랑을 원해요, 다른 이들이 아니라. 나는 로맨스를 원해요. 나는 반짝임을 원해요. 나는 우리 삶에 마법을 원해요."(p.189) 당신도 그렇다면, 이 황홀하고 우아한 연애소설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