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제로 외증조모에게 삭막한 시멘트 건물을 밀고 작은 온실을 짓자고 조르기도 했다. 하지만 외증조모는 늘 온화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별채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아리송한 핑계를 대면서. "그곳은 우리의 것이 아니야. 안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건물을 부술 수는 없지 않니?"

이 정도면 내가 별채에 가지는 공포심에 어느 정도의 설명이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은 나에게 늘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p.17


우박이 쏟아지고 강풍이 몰아치던 10월의 어느 새벽, 외증조모는 50년을 넘게 살아온 적산가옥의 별채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다. 혼자서 일어설 수도 없었던 외증조모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새벽, 홀로 별채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의아했고, 꼭 소리를 들으려는 듯처럼 바닥에 한쪽 귀를 댄 자세였던 것도 기이했다. 이후로 적산가옥은 방치되었고, 운주는 10년 만에 그곳에 도착한다. 외증조모의 유언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지는 붉은 담장의 적산가옥과 비밀로 가득한 별채로 돌아온 운주는 그곳에서 수십 년을, 수 세대를 거슬러 존재할 망령과 조우한다. 가엽고 끔찍한 망령은 별채에 감춰진 비밀로 운주를 이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는 음산하고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우리를 피와 비명이 깃든 그 집으로 데려간다. 


1930년대에 지어진 적산가옥의 첫 주인은 가네모토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무역상이었다. 그는 지주와 농민들에게 빼앗은 땅으로 곡식을 수출해 어마어마한 부를 이루었다. 그가 손을 대는 사업은 크든 작든 모두 성공했고, 발을 빼는 분야는 귀신같이 악재가 생기곤 했다. 덕분에 그에게 조언을 구하려는 풋내기 사업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했다. 간호사였던 외증조모는 그 집에 간호사로 들어가 살며, 몸이 허약해 집에만 있던 도련님을 보살피게 된다. 소년은 주의가 산만하고 성격이 포악해 몸에 상처를 자주 만들고, 작은 동물들을 해부해 바닥에 늘어놓고는 했다. 외증조모가 실제로 겪었던 과거의 경험들은 운주에게 현실의 악몽이 되어 돌아온다. 운주는 꿈 속에서 외증조모가 되어 적산가옥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지켜보게 되고, 소년의 유령은 현실에 나타나 백일몽의 나날을 보내게 만든다. 하지만 운주는 당장 짐을 싸서 저주받은 집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망상에 사로잡혀 별채로 계속 향하게 된다. 




유타카는 무척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런 뒤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 나도 아머지도 곧 죽을 거거든."

소년이 내게 바짝 얼굴을 붙여 왔다. 손목을 붙잡고, 귓가에 짓궂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는 그때 그가 한 말을 얼마가 지나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죽일 거야."               p.95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인간이었던 흡혈인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이 기계에 대항하는 사투를 보여주었던 정보라 작가의 <밤이 오면 우리는>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단요 작가의 <케이크 손>,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이희영 작가의 <페이스>였다. 이번 작품은 <스노볼 드라이브>, <만조를 기다리며>, <입속 지느러미> 등의 작품을 발표해 온 조예은 작가의 <적산가옥의 유령>이다. 언제나 강렬한 임팩트가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도 긴 여운을 남겨주는 서사를 보여주었던 작가이기에 이번 작품 역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호러라는 장르적 요소를 매우 섬세하게 풀어내며 조예은표 새로운 호러 소설을 만들어냈다. 


피처럼 붉은 벨벳 소파와 꾸불꾸불한 내장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잉어 한 마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본채와 차갑고 어두운 별채, 그리고 나무가 빽빽한 정원까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숨과 기억을 주고받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적산가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끊임없이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작품이었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고 말하는 조예은 작가는 요즘 같은 계절에 읽기 딱 좋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유독 길고 덥다는 이번 여름을 함께 하기에 너무 좋은 작품이다. 죽은 자들이 가지는 그 지독함과 애달픔으로 빚어낸,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서늘하지만 온기를 품고 있는 이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