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말들 - 우리의 고통이 언어가 될 때
조소연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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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재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흔적과 유해를 낱낱이 그러모아 그 형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당신의 형상과 지형도가 불완전한 미완성에 그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생의 광휘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당신의 인생에는 오로지 비극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얘기하고자 했다... 나는 당신이 가진 그 빛과 어둠, 모두를 보고자 한다. 당신의 빛을 집어삼킨 그 어둠의 실체를 밝음의 세계 위에 꺼내놓고 싶다.          p.50


2018년 5월 7일, 어머니가 자살했다. 어머니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와 헤어진 후 가족들에게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딸에게 온갖 독설과 폭언을, 아들에게는 애인과 있었던 일을 암시하는 성적 표현이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 약 한 달간은 더 심각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나서, 옥상에서 뛰어 내렸다.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어머니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 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죽음의 이유를 밝혀내는 스토리가 곧 이어질 것만 같은 서두이지만, 이것은 누군가에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한 여성이 살았던 67년의 생애가 가능한 한 빠르게 지상에서 치워버려야 할 부끄러운 죽음으로 치워졌고, 그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가족들은 이후로도 몇 년간 제대로 애도할 수조차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고인의 딸이자 같은 여성으로서 ‘어머니에 대해 말해야 한다’라는 사명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사는 동안 무엇을 갈망했을까, 무엇을 꿈꾸었을까, 밤에는 어디로 영혼이 떠돌았을까. 어머니의 모든 열정, 정념, 수치, 슬픔, 분노, 혐오, 기쁨, 환희 들.... 당신이 살다 간 흔적, 당신이 세상을 사랑한 흔적, 당신이 나를 사랑한 흔적.... 그렇게 저자는 그 흔적을 따라 걷기로 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무모하고 담대하게 만들었을까. 지상에서 사라진 한 인간의 생애에 어둠의 장막을 거둬내어 진실의 빛을 비추는 일은 '쓰기'를 통해서 시작된다. 





일상이 비루하고 남루할지언정 그것을 살아낸 내 일상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일. 그 일상의 비천한 조각들이 모여 현재를 통과한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아침의 나는 오후와 저녁의 나를 통과해 밤의 내가 된다. 밤새 거친 땅을 떠돌던 영혼은 다른 존재로 태어나 아침의 빛을 맞이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은 파동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그리고 이 세계와 에너지를 교환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 세계와 우주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p.190



경제적으로 파산한 노후를 맞이해 학원 건물을 청소하게 된 노년기 여성으로, 외로운 열정의 대상이었던 아들과 급격히 멀어진 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육십 대에 접어들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결혼'이 자신의 불행의 시작점이라 늘 말해왔던 어머니는 자연과 가까워지며, 그곳에서 남자를 만났다. 멀리서 함께 걷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만, 딸로서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어머니에게도 삶의 기쁨이나 몰입이 될 만한 어떤 사건이 생겼다는 데 대한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체 어머니와의 대화 중에 다른 남자에 대해 언급했을 때 어머니는 불같이 화내면서 집안의 수치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자신의 외도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겪게 될 수모와 낙인이 공포였던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욕망을 없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어느 새 이 책에 쓰인 글들은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넘어서 여성들을 위한 이야기로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모성과 욕망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가 어떻게 애도와 자기 해방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보여주었다. 슬픔과 막막함에서 시작해 기어코 다시 삶을 써 내려가는 글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말들'이 트라우마와 상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죽음을 애도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내가 부재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흔적과 유해를 낱낱이 그러모아 그 형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산산조각이 나 버린 삶의 파편들을 글쓰기를 통해 이리저리 맞춰보고, 이어 붙이면서 어머니의 삶을 복원하고,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 책은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쓰인 에세이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과 사유는 웬만한 인문학서 못지 않게 묵직하고 깊이가 있어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읽었다. 타인의 삶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자살과 광기, 그리고 욕망에 대해서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 책을 통해 글쓰기가 가진 힘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금기가 된 죽음이 어떻게 언어화될 수 있는지, 부서진 마음이 어떻게 글쓰기로 치유될 수 있는지.. 이 먹먹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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