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까지 3킬로미터
이요하라 신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아까도 말했지만 아기 달은 지구 옆에 있거든요. 어릴 땐 천진하게 빙글빙글 돌면서 여러 얼굴을 보여줍니다. 기쁜
얼굴, 슬픈 얼굴, 토라진 얼굴, 신난 얼굴, 쓸쓸한 얼굴, 전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지구에서 멀어져 별로 돌지도 않고, 급기야
지구에는 보여주지 않는 얼굴을 갖게 되죠. 뒤에 도사린 나쁜 얼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일면이라고 할까요. 달의 뒷면처럼.... 뭐 성장한다는 게 다 그럴 테지만, 역시 슬픈 일이죠." - '달까지 3킬로미터' 중에서, p.40
남자는 지금 후지산으로 향하는 중이다. 한 이틀 전부터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 일에 신경 쓰느라 아내에게 소홀해졌고, 독립 후에는 경영 악화로 더 집에 신경을 못쓰다 보니 결국 아내는 떠나고 남은 건 엄청난 부채뿐. 어쩔 수 없이 본가로 돌아와 부모님에게 얹혀 살게 되었는데 이듬해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마트 일을 하며 아버지를
돌보다 결국 힘에 겨워 양로원에 입소시키고 나니, 쉰 살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존재마저 반쯤 어디로
사라진 느낌이 든다. 기댈 곳도 없었고, 아직 빚도 남았으며, 전부 허무해져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 저녁 식사 후 우연히 택시를 타게 되는데, 기사는 죽을 곳을 향해 가는 남자를 달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 데려간다. ‘달까지 3킬로미터’라는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는 그곳에서 남자는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달의 뒷면이 가진 의미에 대해,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지독히 씁쓸하지만, 어딘가 마법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 버리고 죽을 곳을 향해가는 남자와 택시기사와의 우연한
하룻밤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표제작인 <달까지 3킬로미터>이다. 지금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는 대략 38만 킬로미터인데, 40억 년 전보다 더 옛날에는 그 거리가 지금의
절반 이하였다고 한다. 지구에서 보는 달의 크기가 지금의 무려 여섯 배 이상이었다는 건데, 아마 육안으로 크레이터까지 보일 정도의 거리다. 달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는 어딘가 수상한 택시기사는 사실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 교사였다고 한다. 학생들을 모집해 천문부를
만들고 아들과 둘이서 밤마다 달을 보곤 했다는 그의 사연은 담담하게 이어지다 어느 순간 울컥하는 감정과 부딪치게 만든다. 부모가 지구, 아이가 달이라며 비유하게 된 계기도 아마 그 사건
때문일텐데,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긴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였다.
떠들썩한 가족이었다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실제로는 저마다 마음껏 쏟아내는
요구에 내가 군말 없이 응해왔을 뿐, 내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다. 내
마음을 헤아리거나 몸을 염려하는 사람도 없다. 어느새 나는 가족들이 잘게 쪼개도 괜찮은 상대가 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리 잘게 쪼개 가져가도 늘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산처럼. 전업주부가 다 그렇지.... 마음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미 첫발을 내디뎌버렸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되건 제자리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 '산을 잘게 쪼개다' 중에서, p.251
인상적인 표제작 외에도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씁쓸하지만 다정한, 담백하지만 뭉클한 일곱 편의 작품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과학적
지식과 과학자가 바라보는 시선을 거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하늘에서 보낸
편지>에서 30대 후반의 독신 여성이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기상청에서 일하는 그 남자와의 스토리는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로 연결된다. 〈암모나이트를 찾는 법〉에서는 부모의 별거와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에 병이 온 초등학교 6학년 소년이 시골에 내려와 우연히 화석 채굴에 인생을 바쳐온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매일매일 화석을 캐고, 조사하고,
모으는 일을 해온 할아버지를 통해 소년은 조금씩 굳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 이요하라 신은 지구행성물리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과학자의
시선으로 여러 작품을 써왔다. 이 작품 역시 매 이야기마다 과학적인 지식과 정보가 꽤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 들어가 있어 전혀 어렵거나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눈 결정 연구에 진심인 기상 덕후, 날마다 화석을 캐는 전직 박물관
관장, 화산을 누비며 돌을 수집하는 대학 강사, 외계인처럼
보일 정도로 수상한 연구원 등 과학이 일상인 캐릭터들이 등장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인간의 삶에
대한 비유를 과학적 지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절묘한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문학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과학의 목소리를 이렇게나 아름답고, 이질감없게 잘 녹여낸 작가가 또 있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올해 읽었던 책 중에서 단연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너무 좋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과 함께 출간된 <8월의 은빛 눈>도
궁금해져 바로 주문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설레임을 안겨준 작가 이요하라 신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소개되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