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슈거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들판과 소나무 숲, 시내를 가로질러 잊힌 작품까지. 모든 게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들판에서 풀을 뜯는 소 떼와 오두막집 지붕, 잊힌 작품의 커다란 더미가 티끌처럼 보였다. 대기 자체가 잿빛이었다. 

이곳 태양엔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태양이 날마다 다른 색깔로 빛난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찰리마저도. 우리는 서로 다른 색깔의 워터멜론을 한껏 잘 키운다.           p.69


'워터멜론 슈거에서'라는 달콤한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파스텔톤의 알록달록한 솜사탕 구름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표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인 최승자가 미국의 헌책방에서 발견해 직접 번역까지 맡아 소개한 작품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표지와 장정으로 다시 나왔다. 이야기는 요일마다 다른 색의 태양이 뜨는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일곱 가지 햇살을 먹고 자란 일곱 가지 색의 워터멜론 즙을 끓여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 쓴다. 


워터멜론 공장에는 커다란 통에서 끓고 있는 달콤한 슈거 냄새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온갖 모양과 빛깔의 슈거들이 가로로 층층히 쌓여 있다. 강에는 송어들이 살고 있고, 한쪽에는 잊힌 물건들의 커다란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잊힌 작품'이라는 장소가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는 '아이디아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브라우티건이 만든 'iDEATH'라는 합성어는 ‘i’와 ‘DEATH’ 혹은 ‘idea’와 ‘DEATH’로 해석되는데, 어느 쪽으로 읽든  ‘DEATH’을 내포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가장 이상향의 장소를 만들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것은 유토피아적 공동체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꿈조차 유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극중 인보일 일당이 아이디아뜨로 찾아와서, 사실 아이디아뜨란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환상일 뿐이라고 폭로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잊힌 작품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그리고 가보길 원치도 않는 먼 곳까지 뻗쳐 있기에.

잊힌 작품 아주 멀리까지 들어가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찰리가 말한, 그곳에 관한 책을 썼다는 그 사람 외에는. 그 사람의 고민거리는 무엇이었을까. 거기 들어가서 몇 주일을 보내다니. 

잊힌 작품은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자꾸 이어질 뿐이다. 그러면 상상이 갈 것이다. 그곳은 크다. 우리보다 훨씬 크다.              p.112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아이디아뜨 근처의 한 통나무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작지만 즐겁고 편안한 통나무 오두막 역시 소나무와 워터멜론 슈거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창밖으로 차갑고 맑은 강이 보이고, 강물에는 송어가 살고 있다. '나'는 워터멜론 씨앗으로 만든 잉크에 펜을 적셔 향긋한 냄새가 나는 목판지에 글을 쓰고 있다. 이 마을에서 마지막 책은 삼십오 년 전에 쓰였고, 지금 쓰고 있는 책은 스물네 번째 책이 될 예정이다. 이곳의 다른 책들은 태워서 땔감으로 쓰이거나, 잊혀진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장소인 '잊힌 작품'에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잔잔하게 이어지다, 한때 마을 주민이었던 인보일 일당이 들이닥치면서 소동이 벌어진다. 주어진 풍요에 만족하며 사는 이들과 그들의 낙원을 부정하는 이들 사이의 난장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그것조차 이 작품 속에서는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가 1967년에 출간되었고, 이 작품은 바로 그 다음 해인 1968년에 출간되었다.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기법과 상상력으로 쓰여 문학적인 신선함을 안겨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목가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사회 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이 마을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영원하지 않은 유한한 삶을 산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탕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동화같은 설정에 시적인 문장들로 쓰인 작품이지만, 줄거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없어 여러 번 읽어도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명하지 않음과 이해할 수 없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면 <미국의 송어낚시>를 우리말로 옮겼던 김성곤 교수가 작품 해설을 썼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시처럼 리드미컬한 산문으로 쓰인 이 작품을 통해 목가적인 꿈이 보존되어 있는 브라우티건 표 달콤쌉싸름한 환상의 세계를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