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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평점 :
"당신은 인류의 진보를 바라지 않나요?" 미스 챈설러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글쎄요. 진보적인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에게 좀 보여주실 건가요?"
"진보를 향한 진지한 노력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확신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여줄 만한 사람인지는 확신이 안 드네요"
"지극히 보스턴적인 어떤 것인가요? 그렇다면 보고 싶은데요." 베이질 랜섬이 말했다. p.35
이상한 일이다. 왜 갑자기 헨리 제임스일까. 작년부터 헨리 제임스의 작품들이 연이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헨리 제임스의 문학비평과 에세이 아홉 편을 엮어낸 책을 시작으로 단편소설, 영화 원작 소설이 나오더니 그의 중기를 대표하는 실험적인 장편 소설 <보스턴 사람들>을 비롯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헨리 제임스편이 나왔고, 최근에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쏜살문고도 출간되었다. 대부분의 고전들이 장황한 묘사와 특유의 만연체로 읽기 장벽을 높여주지만, 헨리 제임스의 소설 역시 읽기 쉽지 않다. 고전 작품들 중에도 악명 높 은 걸로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고전 작가들 중에 그렇게 상업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 출판계에 헨리 제임스 붐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가장 묵직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보스턴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비혼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많아 지면서 새로운 가족 형태에 대한 관심도 높아 졌는데, 그 중에 여성 2인 가구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면 '보스턴 결혼'이라는 키워드도 등장하게 된다. 이는 미국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결혼하지 않고 우정을 나눈 독신 여성들을 일컫는 말로, 바로 헨리 제임스의 작품 <보스턴 사람들>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 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작품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여인의 초상>이 발표되고 5년 뒤인 188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 드물게 정치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문제작으로 꼽힌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벌어졌던 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냈는데, 이를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관계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맑게 갠 회상의 순간은 모든 남녀가 적어도 한 번은 경험하는 것으로, 과거를 현재의 빛으로 읽게 되는 이 순간, 사물의 이치가 마치 못 보고 지나쳤던 이정표처럼,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하던 곳에서 뚜렷이 떠오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잘못된 진로와 엉뚱한 관찰과 현혹되어 착각했던 그 모든 지형과 함께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 순간 모든 이들은 올리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망을 깨닫게 되지만, 아마도 그녀가 겪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p.641
미국 남부 미시시피 출신의 변호사인 베이질 랜섬은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올리브 챈설러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을 방문한다. 랜섬은 남북전쟁 참전자이자 강경한 보수주의자였고, 올리브는 남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고, 계급 투쟁으로서 여성 운동에 몸담고 있다. 올리브는 그와 식사 후 자신이 모임에 가야 하는데 혹시 동행하겠느냐고 랜섬에게 묻고, 그는 파티에 가본 적이 없다며 함께 가보겠다고 말한다. 그곳에는 올리브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여성의 고난에 대해 연설하는 한 소녀를 만나 동시에 호감을 느낀다. 일류 연설가인 버리나는 최면술 치료사인 닥터 태런트와 왕년의 노예제 폐지론자 집안 출신의 태런트 부인을 부모로 두었다. 올리브는 젊음과 우아함과 천진난만함으로 매력적인 존재가 지닌 비범한 통찰력에 한 눈에 반해 버리나와 함께 한다면 대단한 결과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랜섬은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껴 버리나에게 관심을 표한다. 그렇게 세 사람의 기이한 삼각 관계가 시작된다.
이 두툼한 책을 읽다 보면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이게 된다. 분명 19세기를 배경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올리브의 진보적 이상과 랜섬의 권력에의 의지는 진보와 보수의 선명한 대립으로 읽히고, 여성 참정권 운동과 여성해방론 역시 당대의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 투쟁으로 연결된다. 랜섬은 '여성의 지위란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성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여성이 고통 받아온 존재가 아니라 아예 남성이 여성에게 끌려 다녔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뼛속까지 남성성의 화신인 베이질의 모습은 사실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남성들의 모습과도 매우 유사해보인다. 반면 성차별과 남성 특권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보고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올리브의 모습은 노예해방론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이렇게 랜섬과 올리브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보스턴 사람들>은 과거를 현재의 빛으로 읽게 되는 놀라운 순간을 선사하는 마법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한 편의 멜로드라마이자, 성장소설이고, 더 나아가 사회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이 근사한 작품을 놓치지 말자. 이 작품은 지금 우리가 왜 헨리 제임스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을 들려 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