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
브라이언 에븐슨 지음, 이유림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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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들려줬던 여러 이야기 속에서 부모님은 이주민이자 개척자였고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딘 사람들이었지만, 어떤 실패를 겪으며 이곳에 남은 유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떨 때 언니는 우리가 있는 곳이 남쪽 대륙 외진 곳 어딘가이며, 부모님은 그곳에서 침몰한 배의 유일한 생존자들이었다고 말했다. 또 어떨 때는 부모님이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서 공기를 타고, 일반적인 세상의 질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또는 거울을 통해서 이쪽으로 건너왔다고 말했다.              - '두 번째 문' 중에서, p.66~67

 

앞쪽에도 뒤쪽에도 머리카락뿐이어서 어느 쪽이 앞모습인지 구별할 수 없는, 얼굴이 없는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해 딸이 사라진 방에서 들려오는 딸의 노랫소리에 시달리는 남자와 영화 촬영을 위해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는 영화감독, 인간의 살아 있는 몸을 탐하는 우주 괴물, 돌연변이 생명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생존자들, 부모님이 어디론가 사라진 텅 빈 집에 남겨진 두 자매, 아내가 실종된 남편의 비극 등 짧게는 단 두 페이지, 길어도 이십 여 페이지 분량의 단편들은 모두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드라고는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딸을 깨우러 갔지만 방에는 딸이 있었던 흔적 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방을 정리했으며, 어디로 간 것일까. 게다가 딸의 침실은 그가 전날 밤 그 방을 떠났을 때 그대로 밖에서 잠겨 있는 상태였다. 그는 딸이 방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아닐까 싶어 찾아 봤지만, 방은 물론 집 안 어디에도 딸은 없었다. 딸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집 안의 모든 곳을 뒤졌지만 아이는 없었고, 어떻게 봐도 불가능할 것 같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딸아이가 밖으로 나간 게 분명했다. 그는 이웃집으로 가서 혹시 딸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예순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는 산소 튜뷰를 연결한 마른 몸으로 걸쇠가 걸린 사이로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자아이를 보지 못했다며, 아이가 실종되었다면 집마다 돌아다닐 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건 드라고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는 과연 딸을 찾을 수 있을까.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점차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당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빌라드는 그렇게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제가.. 엄밀히 말하다니요?
"당신은 무언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당신의 몸은 선체가 부서진 이후에 얼어붙었는데, 꽤 온전한 상태로 보전될 만큼 그 과정이 빠르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뇌를 스캔할 수 있었죠. 당신의 생각을요." 제가 스캔본이라는 말인가요?
"그날 목숨을 잃은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혹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목격했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내야 합니다."           - '마지막 캡슐' 중에서, p.213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가 등장하고, 낮에 마주하는 상담사가 밤에 집에 나타나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행동하고, 현실의 조각난 틈에서, 숨고 싶은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다. 우리는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지켜볼 뿐이다. 작가는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강박과 집착에 집어삼켜진 삶들을 그려 보이며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은 균열로 가득한 부서진 세계를 창조해낸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스물두 작품은 환상과 호러 SF 등의 여러 장르를 보여준다. 미국 언론에서 '스티븐 킹의 팬들이 반길 상당히 유능하고 조금 덜 다작한 작가가 여기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오싹하고, 강렬한 이야기들이다. 대담하고, 독창적이고, 파격적이며, 특히나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일상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공포와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환상이 잘 버무려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미국 사변소설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브라이언 에븐슨은 이 작품으로 2019년 셜리 잭슨상과 2020년 월드 판타지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섬뜩하고, 기괴하고, 오싹하다.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어떤 사악한 존재가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유혈이 낭자하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등장하기도 하며, 누군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가스라이팅처럼 공포의 종류도 매우 다각도로 보여진다. 극중 한 인물의 대사처럼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데에 이유가 없다'는 점이 가장 공포를 자아낸다. 혹시나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떠한 차이도,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돌이킬 수 없으며,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극중 인물들은 자주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마음은 고스란히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착한다. "세상은 이상한 곳이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이 말은 극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스티븐 킹과 히치콕, 러브 크래프트와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꼭 만나보길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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