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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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한다고?"
"파업이요!"
노인 뱃사공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요상한 바람이 들어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 거야?"
"언제까지 죽지 못해서 이 짓을 할 거예요? 벌써 수십 개월째 강행군이라고요. 대체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살기 위한 최소한의 선을 만들자는 거예요. 저승에 우리 의견을 내어 협상하는 거죠. 월급 인상과 적정 인원 투입으로 이뤄지는 적정 근로 시간 및 안전한 근무 환경!"               - 배명은,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 중에서, p.48~49

 

책과 서점에 관한 SF, 팬데믹 시대의 로맨스, 귀신날 호러, 고전 SF오마주, 판소리 SF 등 다양한 장르소설 앤솔러지를 선보이고 있는 구픽의 앤솔러지 신작이다. 이번에는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으로 다섯 명의 장르 소설 작가들이 현대 사회의 노동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죽은 자들이 도착하는 삼도천 뱃사공들이 과도한 업무와 부당한 임금으로 인해 파업을 시작하고, 월급과 생계를 위해 소처럼 말없이 일했지만 제빵 회사의 착취와 인간적이지 못한 처우로 인해 어린 시절 꿈은 냉장고 속에만 넣어 두는 것이 현실이고, 어느 날 갑자기 읽고 있던 웹소설 속 산업혁명기의 하층 계급 노동자로 빙의되어 남자를 만나 신분 상승할 예정인 여주인공을 투쟁하는 혁명의 주인공으로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번듯한 직장 없이 세상에 불만만 많은 딸인 줄 알았는데, 밖에서는 용기 있는 투사이자 헌신적인 활동가로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사고로 죽은 뒤에야 알게 되는 엄마가 있고,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외국인 노동자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골의 파출소장도 있다. 노조 탄압, 외국인 노동자 처우, 하청 노동, 중대재해 등 지금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점들이 전면에 드러나 있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 도덕이 뭔데? 애쉴리, 너는 우리를 사람 같지도 않게 대하는 작업반장한테도 지금처럼 덤빌 수 있어?"
애쉴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진짜 사람답게 사는 거지. 이미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가 뭘 어떡하냐고. 어제 메리가 말했듯이..."
클레어의 눈에서 명백한 경멸을 읽었다.
"사람마다 참을성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야."           - 이서영,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 중에서, p.138

 

배명은 작가는 노조 활동을 하다가 사고사한 망자를 통해 이승이든, 저승이든 벌어질 수 있는 노동력 착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근로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일하는 시간과 무게만큼의 임금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왜 노동자들은 그렇게 당연한 권리 조차 보장받지 못해 목소리를 높여 투쟁해야 하는 것일까. 남겨진 가족들이 걱정되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러운 남자는 죽은 지 이레째 되는 망자들이 도달하는 삼도천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다. 살아가고 일하는 것이 저승이라고 뭐 다른 거냐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죽어서도 죽어라 일해야 하냐고 말이다.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던 삼도천의 뱃사공들은 '부당하다면 모두가 일어나야 한다'는 그의 말에 힘입어 파업을 선언한다. 저승에 가서도 정당한 일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박수 쳐줄 만한 일이다.

 

이서영 작가의 로맨스 판타지 작품도 재미있게 읽었다. 웹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회귀물의 일종인데, 실제 작가가 M노총 산하의 모 산별에서 조직 담당자로 3년간 일해 왔기에 노동조합이 곧잘 악역이 되곤 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잘 풀어낸 것 같다. 로맨스 서사의 기본이 남주가 여주를 발견해 내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는 여주가 자기 스스로를 발견해내면서 로맨스를 무너뜨리는 서사로 그려지고 있어 더 재미있었다. 갑작스럽게 웹소설 속 세계로 빠져 들어간 '나'가 해당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래 자신이 하던 일을 해 나가며 버텨낸다는 것, 그것이 아주 이상한 방식의 악녀가 되는 일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 실제로 도시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공장을 운영하는 힘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 공장이 돌아가게 만드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 모두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폄하하는 세상 속에서, 투쟁이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진 않지만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는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너무도 현실과 맞닿아 있는 생생한 이야기들이지만, 장르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는 작품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부당한 세상에 맞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며 이 작품을 읽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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