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몫의 밤 1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김정아 옮김 / 오렌지디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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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가 어둠에 가 있다. 이해는 됐다. 널 따라갈 거라고 몇 번을 약속했던가. 널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며칠 전, 탈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널 위해 무슨 일이든 해줄 수는 없다고. 영원히 함께야, 로사리오는 맹세했었다. 그녀는 후안이 어둠에 속한 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죽고 나면 그곳에 가게 될 거란 사실도. 그렇게 그녀는 예상보다 더 일찍 그와 운명을 나누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내 사랑, 그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너와 내가 아니게 될 거야. 그곳엔 그림자와 굶주림, 뼛조각뿐이야. 죽은 세상이거든.            - 1권, p.143

 

후안은 여섯 살짜리 아들 가스파르를 데리고 비밀리에 여행길을 떠난다. 하지만 날이 잘 벼려진 칼 한 자루와 재로 가득 찬 주머니, 산소 튜브 등 평범한 여행길에 필요한 물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챙겨 넣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게다가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후안은 손가락이 저릿했고, 가슴의 부정맥은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으며,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후안의 아내이자 가스파르의 엄마인 로사리오는 삼 개월 전에 지나가던 버스에 치여서 죽었다. 남편과 아들은 여전히 그 죽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후안은 평범한 여느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는 어둠의 신을 소환하는 능력을 지닌 메디움으로 선천성 심장병을 치료해준다는 명분 아래 기사단에 끌려가 제례와 의식에 이용당해 왔다. 심장병 수술은 여러 차례 진행되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몸상태가 좋지 않아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여행길에서 후안은 아들이 자신의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아들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거라고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자 실낱같은 희망조차 모두 사라져 버린다. 유전되는 형벌, 그는 자신의 목에 쇠사슬이 매인 듯한 실망감에 목이 메어온다. 어떻게든 가스파르만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자신처럼 유령을 보거나 소환하고, 다른 세계의 문을 열 수도 있는 능력이 아들의 삶을 어떻게 만들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스파르가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메디움으로서 육체와 정신이 파괴되는 짧고 가혹한 삶을 살다 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과연 그는 기사단으로부터 아들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을까.

 

 

 

매일 밤마다 아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며 사랑에 빠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잔잔한 파도 같은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감기에 걸린 아이를 돌보던 중 갑자기 아이가 숨을 쉬지 않은 적이 있었다. 복도의 어스름한 불빛 때문에 아이의 움직임이 멈춘 듯해 보였다. 아기 침대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자식이 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자식의 죽음 이후에는 죽음밖엔 없다는 사실을. 출구 없는 어둠만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 2권, p.191~192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은 국내에 소개된 두 편의 소설집을 모두 읽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부조리한 오늘날의 사회 현실을 호러로 풍자한 작품들이 수록되었던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부조리한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공포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던 소설집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두 편 모두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둡고, 음울하고, 오싹하지만 이상하게 매혹적인 고딕 호러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가라 이번 신작은 정말 기대하며 읽었다. 장편 소설인데다, 두 권 분량이 무려 1,0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수백 년에 걸쳐 어둠의 신을 숭배해온 기사단과 맞서게 된 한 부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기사단의 일원과 가족이 된 남자가 어둠의 신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매 '메디움'이고, 아들이 자신처럼 그들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악한 기사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이야기는 기사단의 네 가문이 이리저리 얽혀 있는데다, 라틴아메리카의 민속 주술과 영미권의 오컬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상당히 복잡하고, 어둡고, 밀도가 높다. 휘몰아치는 폭풍우처럼 책을 읽는 이들의 머리를 쥐고 흔드는 작품이라 뭔가에 홀린 듯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고 나서도 이야기의 잔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곧 애플 TV에서 드라마화될 예정이니, 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작품이 어떻게 영상으로 펼쳐질 지도 기대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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