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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말을 듣는 눈 - 법의학,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죽음의 시간 ㅣ 드레의 창
나주영 지음 / 드레북스 / 2024년 1월
평점 :
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기는 쉽지 않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만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말을 하지 않는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무엇일까? 나는 죽은 사람의 말은 내 눈을 통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내가 시신을 보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본다'라는 뜻의 단어가 '부검'이 되었으리라. p.24
법의학자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이다. 법의학이라고 하면 흔히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아무런 증거 없는 살인에서도, 완벽하게 사고사로 보이는 시신에서도, 전혀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사건에서도 법의학자들은 숨겨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곤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본래 법의학은 재판의학이었고, 부검 등 죽음에 제한되는 학문은 아니라고 한다. 법의학은 법률상 문제가 되는 의학적, 과학적 사항을 연구해 이를 해결함으로써 법을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고 인권 옹호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법의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이자 법의학연구소 소장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고민하는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시각으로 본 법의학과 법의학의 시각에서 보는 인간에 관해 말한다. 법의학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법의학을 통해 규명되는 사인과 사망의 종류와 사망증명, 개인식별을 비롯해 법의학의 눈으로 보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죽음 이후의 변화, 검시제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 본다.
처음 시신이 내게 왔을 때는 일반적인 주거지 안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으로 내인사로 추정되었다. 부검을 시작하기 전 담당 형사와의 면담에서 형사도 내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가 주거하는 곳은 14층이었고, 현관문은 잠겨 있어서 119가 강제 개방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거지 안에서는 물색 흔적이 없었고 현금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부검이 마무리된 후 망인의 사인은 머리 부위 손상으로 판명되었다... 사망 전 망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수사가 필요해졌다. 홀로 거주하던 고립된 사람의 죽음도 수사가 필요한 죽음일 수 있다. p.148~149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죽음은 늘 그렇게 삶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사망하는 사람은 2021년 기준 31만7,680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중 몇 건이나 부검이 이루어질까? 2017년 기준으로 당시 시행된 부검을 다룬 통계 논문에서는 사망자 28만5,534명 중에서 법의학자들이 행한 부검은 8,888건으로 전체 사망자의 3.1%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활동 중인 법의병리학자가 우리나라에 40명~50명 정도라고 하니, 부검 수치가 결코 낮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있는 40여 개의 의과대학 중에서 법의학을 전공한 교수가 근무하는 법의학교실이 존재하는 학교도 10여 곳에 불과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법의학과 검시제도의 현실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다.
법의학의 시선으로 보는 인간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우리에게 말을 하는 인간이다.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 유일하고 말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이 법의학이라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므로, 그 어떤 학문보다 실재적으로 죽음을 다루는 학문인 법의학에 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거나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의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