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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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였다. 거대한 문어가 다리로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지구 ? 생물체는 ? 항복하라.

문어가 말했다. 아니 "문어가 말했다"라는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하지만 하여간 그 당시 나는 문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문어가 말하는 걸 듣다니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같이 했다. 애초에 대학교 건물 안에 복도를 꽉 채우는 크기의 거대 문어가 등장해서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 내 평생에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문어' 중에서, p.27


해양 생물을 주제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정보라 작가의 SF연작소설집이다.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라는 제목으로 쓰인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나'와 '남편(위원장님)은 자꾸만 말하는 해양 생물과 마주하고, 그때마다 정체 모를 검은 양복 군단에게 연행된다. 진지하지만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배경들은 대부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가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소속이고 실제로 국회 앞에서 고등교육법 개정 농성을 한 적이 있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위원장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해 포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살면서 바다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이 책의 제목을 '포항 소설'이라고 하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새벽에 대학교 본관 건물 복도에 문어, 혹은 문어처럼 생긴 어떤 생물이 등장한다. 때는 고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강사법이라고 하는 것이 제정되어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났고, 잘려서 열받은 선생님들이 대거 노조에 가입해 농성 중인 시기였다. 농성 천막을 홀로 지키던 위원장님은 자다가 배가 고파서 깼고, 잠결에 자신한테 오는 문어를 잡아 라면에 넣는다. 그리고 그 이유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취조실에 있는 참이다.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대학교 건물 복도에 문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로 시작되는 대화는 벌써 한 시간째 똑같은 말의 되풀이 상태였다. 실제로 이 소설 <문어>의 초반 5~6쪽 정도는 2021년 모 대학교 농성장에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농성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러시아 문학과 문화 수업도 열심히하던 작가는 러시아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바다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나'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대게가 등장하는 작품 <대게>가 만들어 진다. 





(그러니까 떠나요. 잔인한 권력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가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예브게니가 다른 다리들로 나를 받치고 집게발에 기대어 울게 해주었다. 집게발은 비린내가 나고 거칠고 단단했다. 나는 그 거친 단단함에 기대어 울었다. 검은 덩어리도 예브게니도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 대게' 중에서, p.84


작가는 <문어>, <대게>, <상어>까지 쓰고 3부작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이야기를 몇 개 더 붙여서 책으로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상어>가 탄생하고 이어 <개복치>와 외계 생물 거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한 <해파리>와 <고래>까지 만들어 진다.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일본은 원전 폐수를 바다에 버렸으며,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나빠지고 있지만, 어디선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섯 종의 해양 생물이 등장하는 이 연작 소설들은 세계의 위기 속에 있는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과 생물들이 죽으면 인간도 죽게 마련이다. 그러니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지구가 망가지지 않도록 맞서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간강사인 작가가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이야기에서 시작해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적인 문제를 거치고, 지구 환경 위기에 이르는 여러 이슈들을 보여준다. 이길 것 같으니까 싸우는 것도 아니고, 도망칠 데가 항상 있어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기엔 열받으니까, 안 싸울 수는 없으니까 싸우는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누군가를 응원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었다. 해양 생태계 파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처분과 장애인의 이동권을 무시하는 시설, 세상 전체가 의존하면서도 무시하고 착취하는 돌봄의 가치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어 아주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지구 생물체가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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