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2
단요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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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한 소음 속에서, 약함과 악함의 경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그저 무해할 수 있었더라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를 다른 방식으로 아끼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철학자가 말하길 자연 상태에서 잠든 거인은 난쟁이에게도 죽을 수 있으므로 인간은 평등하다고 했다. 그 말에는 아주 약한 사람조차 상대를 죽일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걷어채인 아픔을 자신의 단단함으로 삼는 자세는 둘 중 하나다. 너무 오래도록 앓은 탓에 그만 나아버리기로 결단한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p.55~56


맨손으로 살아 있는 걸 만지면 아무거나 케이크로 바뀌어 버리는 남자가 있다. 가끔씩 손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머릿속까지 깜빡거리는데, 뭐든 만져야 정신이 돌아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 한쪽에 쥐 사육장을 만들고 케이크를 만들어야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경직 사무관으로 평범하게 살았던 그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변두리 원룸촌에서 업소에서 일하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중학교 3학년 소녀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 어떤 보살핌이나 훈육,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자란 선머슴 같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못된 짓만 골라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못된 애의 곁에서 불쌍한 애들을 괴롭히고, 못된 짓을 함께하며 살던 소녀는 어느 날 케이크 손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소녀의 이름은 현수영이지만,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안혜리는 그녀를 현수라고 부른다. 친구들은 수영을 안혜리의 개이자 일종의 남편처럼 여긴다. 수영은 키도 큰데다 머리도 짧았고 살갗도 까무잡잡해 보통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남자애로 보인다. 안혜리는 학교에서 겉도는 애들을 모아놓고 싸움판을 종종 벌이곤 한다. 안혜리는 투견장의 주인이었고, 겉도는 애들은 투견이었으며, 그의 곁을 지키는 수영은 그녀의 행동대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딜 가나 겉돌았던 수영은 세 마디 이상의 문장을 만드는 법을 몰랐고, 기본적인 예절이나 행동에 대해서 전혀 배우질 못했다. 그런 수영을 데리고 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욕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 바로 안혜리였다. 그 모든 것에 선의가 담기지 않았을지라도 혜리가 베푼 모든 시간이 고마웠던 수영은 그녀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갇혀 별다른 불만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케이크 손이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그 셋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만을 그 순간의 이미지로 삼고 나머지는 외면하는 방식으로 삶을 버텨왔다. 반면 상식적이며 교양 갖춘 사람들이 보이는 속물성이란 사랑할 만한 것만을 사랑한 다음 따지러 올 사람이 없는 채무는 그저 잊어버리는 태도다.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의 더러움은 오로지 저들의 몫이며 자신에게는 빚이 없다는 확신이다. 그런 속물성을 거부할 방법이, 속물조차 되지 못할 무언가에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뿐이라면 삶은 고통이거나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이건 파국이 아니었다. 다만 싱겁고 지겨웠다.               p.147


중학생 여자애와 서른 넘은 남자와의 기묘한 우정은 세상의 시선으로 보자면 숨겨야 하는 무엇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안 된다고 정해진 일들은 사실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고, 그렇게 따지자면 옳고 그름의 경계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어지기도 한다. 엄마의 남자가 집에 오면 언제나 밖으로 나가야 했던 수영에게는 시간을 때울 공간이 필요했고, 집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살던 남자에게는 말 상대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남자는 가끔씩 와서 말 상대가 되어주는 조건으로 공부를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했고, 수영은 그렇게 남자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두 번이, 이틀에 한 번이 됐고, 방학이 되자 매일로 변했다.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낯설고 비현실적인 공간이 이상하고 편안한 꿈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수영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인간이었던 흡혈인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이 기계에 대항하는 사투를 보여주었던 정보라 작가의 <밤이 오면 우리는>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다이브>, <개의 설계사>, <마녀가 되는 주문> 등의 SF작품으로 만났던 단요 작가의 첫 중편소설이다. 이기호 작가와 조예은 작가의 추천평이 기대감을 더해 주었는데, 다 읽고 나니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었다. 단요 작가는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과 불행을 아닌 척 즐기면서 사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남자가 만들어내는 케이크는 아름답고 달콤했지만, 결국 살아 있던 존재를 무생물로 만들어서 탄생한 것이었다. 무언가의 비명과 죽음이 만들어내는 케이크, 어른들의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세계, 그 속의 비정함과 잔인함, 그들만의 회계장부는 악의가 없어도 폭력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의 불행이 또 다른 누군가의 행복이 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긴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단요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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