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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사랑 이야기 ㅣ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평점 :
"당연히 알고 있었죠. 여기가 '원앙 보금자리'잖아요. 남녀가 서로 엉겨붙어 있는데 범죄가 안 일어날 리 없죠. 그래서 교도소도 있는 거고요."
"연상 능력이 대단하네요."
"사실 지금 좀 울적해요. 남자를 죽였거든요. 자수해야겠죠? 죽일 때 그 사람이 발버둥 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추이란이 진주의 등을 토닥이며 그 남자를 사랑한 거냐고 물었다.
"그럼요. 난 바보니까. 저 문 좀 열어줄래요?" p.65
추이란과 웨이보는 1년 전쯤 성매매 업소를 함께 운영하는 온천여관에서 만나 애인 사이가 되었다. 서른다섯의 추이란은 남편이 8년 전에 죽어 과부였고, 마흔여덟의 웨이보는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어느 날 웨이보는 집에 중요한 일이 있다며 약속을 취소하더니, 그 뒤 두 달이 넘도록 연락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뒤 자꾸만 웨이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추이란은 그동안 쌓인 휴가를 몰아서 고향을 방문한다. 추이란은 친척 오빠 부부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며칠 지내다 죽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된 넷째 숙부의 망령을 만난다. 이야기는 추이란의 애인 웨이보, 웨이보의 또 다른 애인이었던 미스 쓰와 접대부 롱쓰샹, 그의 아내인 샤오위안, 추이란에게 치근덕대는 골동품점의 미스터 유, 짝사랑하는 경찰관 샤오허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사이에서 사랑은 이리 저리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떠나 보내고, 빼앗아가는 등 얽혀 있다. 극중 룽쓰샹이 추이란에게 “조신한 여자던데. 우린 그런 말이 별로 달갑지 않더라고.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라고 말하자, 추이란이 “나도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데.”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사랑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쪽에선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쪽에선 영원한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냐고 말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자유롭고,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전혀 가볍지 않다. 죽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등장해 현실과 환상과의 경계를 넘나들고, 내면을 넘어 심연에 이르는 사유가 세밀하고 감각적이라 묵직한 페이지만큼이나 밀도 높은 작품이었다.
아쓰는 팔자가 센 여자였다. 어부의 아내도 되지 못했고,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도시의 밤을 배회하는 여자가 되었다. 순간 오한이 들었다. 죽으려고 이러는 걸까? 아니다. 아쓰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을 내딛었다. 그동안 몇 년씩이나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이제 찾은 걸까, 아니면 아직도 찾지 못한 걸가? 아쓰에게 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p.459
꽤 많은 등장인물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세속적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그들이 스스로의 욕망에 갇혀 있지 않고, 이리 저리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넘어 일종의 방종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험적이고도 환상적인 구조로 짜인 이 작품은 온천을 들락거리는 남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데, 언뜻 남녀의 욕망을 표면화시켜 보여주는 듯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으로 점점 들어가 심연에 도달하는 깊이 있는 전개를 선보이고 있다. 인물들은 모두 상대방의 심연을 불현듯 알아차리고, 집을 가진 사람조차 고향을 찾아 떠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고, 어느 순간 작가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완전히 갇혀 버린 듯한 느낌도 드는 그럼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매년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찬쉐의 대표작이다. 보르헤스, 칼비노에 견주어지며 자신만의 신화적 세계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종잡을 수 없는 전개다’ ‘변화무쌍하다’ ‘수수께끼 같다’는 평을 받곤 하는 찬쉐의 소설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어 어떤 이야기가 그려질 지 너무 궁금했다. 철학적 사유와 난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거침없고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상상력, 찬쉐의 대체불가능한 스타일, 음란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세계, 마술 같은 세계로 빨려드는 환상 스토리 등이 기존 국내에 출간되었던 찬쉐의 작품에 대한 설명들로 그 독특한 매력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왜 찬쉐의 작품에 대해 '현기증 나는 이야기의 세계'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불가능한 스타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새로운 세기의 사랑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