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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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 사실 천재적 발상이지. 그 게임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야, 왜냐면 내가 탐험하는 세계가 현실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게 해주니까. 현실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니까 현실에서처럼 이동할 필요가 없는 거야. 난 우리 게임을 그런 식으로 만들고 싶어. 지지처럼 됐으면 좋겠어. 다만 <콜로설 케이브>처럼 두 장소를 왔다갔다하는 게 아니라, 두 세계를 왔다갔다하는 거지. 가령, 한쪽 세계에서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인데, 다른 세계에서는 히어로야. 그리고 게임에서는 양쪽 세계를 다 플레이할 수 있어. 아직 구체적으로 설정을 완성한 건 아니야. 초기 아이디어 상태지."             p.233

 

열한 살 소녀 세이디는 항암치료로 예민해진 언니 앨리스의 병실에서 쫓겨나 대기실에 혼자 있다가 친절한 간호사를 만나 휴게오락실에 가게 된다. 그곳에는 웬 남자애가 게임을 하던 중이었는데,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샘이었다. 세이디는 샘은 그렇게 함께 게임을 하며 아주 잘 맞는 게임 파트너가 된다. 샘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6주 동안 두 마디 이상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세이디를 만나면서 비로소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간호사의 부탁으로 세이디는 매일같이 병원에 가서 샘과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을 봉사활동 시간기록지에 서명을 받으며 기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지만, 14개월 동안 지속된 그들의 우정은 샘이 시간기록지의 존재를 발견한 날로 끝났다.

 

그리고 6년이 지난 뒤, 세이디는 MIT 컴퓨터과학과에 다니고, 샘은 하버드대학교 수학과에 다니던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만나게 된다. 짧은 재회 후 세이디는 샘에게 자신이 만든 게임이 담긴 플로피디스크를 건네고, 샘은 집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인 마크스와 함께 그 게임을 플레이해본 뒤 그녀와 함께 게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게임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어린 시절 게임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당시에 무시무시한 통증에 시달렸던 어린 그가 죽고 싶다는 마음을 누를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바로 게임이었고, 현실의 문제를 잊은 채 플레이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이디와 샘, 그리고 마크스까지 프로젝트에 합류해 일년 여의 시간 동안 게임 <이치고>를 완성시키게 되고, 그것은 예상치 못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겨우 이백여 페이지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육백삼십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을 가지고 있고, 그건 이들의 성공 뒤에도 삶은 계속 된다는 것, 그 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과 사랑, 실패와 성공, 절망과 구원, 상실과 치유에 이르는 놀라운 드라마는 그렇게 계속 된다.

 

 

 

너는 게이머이고, 그 말은 곧 ‘게임 오버’가 하나의 구성 요소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얘기다. 게임은 네가 플레이를 그만둘 때에만 끝난다. 언제나 또다른 생명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이라도 끝이 아니다. 독살당할 수도 있고, 염산이 든 대형 통에 빠질 수도 있고, 목이 잘릴 수도 있고, 총을 백 발 맞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재시작을 클릭하면 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음번엔 제대로 해낼 것이다. 다음번엔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p.483~484

 

게임의 좋은 점은 인생보다 공평할 수 있다는 거다. 훌륭한 게임은 어렵긴 해도, 투자한 시간과 노력만큼의 보상을 반드시 돌려 준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노력이란 것이 항상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열심히 산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애초에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 대부분 태어난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예상되는 지점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몇 번이고 죽고 패배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은, 무한한 재시작의 세계인 것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무한한 부활과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이 바로 게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여기, 이러한 버추얼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버추얼 세계가 현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대학생들이 있다. 이 작품은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이 하버드와 MIT를 다니는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 의기투합해 기발한 아이디어와 플로피디스크 하나로 게임계를 뒤집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신체적 장애를 가지게 된 아시아계 미국인이자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샘과 부유한 배경을 가져 자유롭게 살아왔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게임계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세이디, 두 사람의 관계는 여타의 러브스토리와는 굉장히 색다른 서사로 진행된다. 그들의 관계는 친구보다는 더 가깝고, 결코 연인이 되진 않지만, 서로의 비밀을 아는 가장 가까운 존재로 오랫동안 함께 한다. 왜냐하면 옛날에 내가 바닥을 쳤을 때 네가 나를 구했으니까, 왜냐하면 인생에서 합이 딱 맞는 협업 파트너는 아주 희귀하니까..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서로를 존중한다. <섬에 있는 서점>, <비바, 제인> 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개브리엘 제빈의 신작은 마스터피스로, 롤플레잉 게임(RPG), 이인칭시점, 인터뷰, 게임 채팅 등 다양한 형식을 활용해 현실과 픽셀을 넘나드는 청춘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어쩌면 사람을 절망에서 구원하는 것은, 기꺼이 놀고자 하는 의지'라는 것을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마구잡이식 재난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는 현실 세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당신에게, 놀랍도록 생생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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