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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평점 :
어떤 사람들은(나도 그중 한 명이다) 해피엔드를 싫어한다. 우리는 속았다고 느낀다. 가해가 규범인데. 파탄의 길이 가로막히면 안 되는데. 산사태 때 산이 움츠린 마을을 불과 2,3피트 남겨놓고 무너지기를 그만둔다면, 산의 행동은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내가 이 착한 노인이 나오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있었다면, 그가 크레모나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강연일이 이번 주 금요일이 아니라 다음 주 금요일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편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p.33
러시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티모페이 프닌은 미국으로 망명해 웬델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야기는 기차의 객실에 앉아 있는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어딘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다. 게다가 프닌 교수는 현재 기차를 잘못 탄 상태였고,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다. 그가 맡은 러시아어 과목의 수강 현황을 보면 수강생은 몇명 되지도 않았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태도 또한 가벼운 아마추어의 태도였다고, 작가는 다섯 페이지에 걸쳐서 그의 약점들에 대해 묘사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닌에게는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다고 쓴다.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엉터리 영어로 과거를 트라우마처럼 회고하는 망명자이자 아웃사이더인 프닌의 삶은 주인공 프닌의 서사와 그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화자의 서사, 그리고 작가 노보코프의 시점인 세 차원으로 서술된다. 화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나중에야 드러나고, 작가인 나보코프의 시점은 마지막 7장에서 본격적으로 보여지지만, 작품 곳곳에서 이 세 가지 서술 차원이 중첩되고 균열되고 분리되어 독자로서 읽기 결코 수월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 나보코프의 다른 작품들을 충실히 읽어온 독자라면 언뜻 실험적인 시점 전환 기법이라던가, 단순해 보이지만 이면은 매우 복잡한 이야기라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이의 마음이라는 수용적 공간에 평생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가정 교사와 내가 프닌 박사의 대기실에서 보낸 시간의 공간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미니어처 창문의 푸른 자국이 벽난로 선반 위 오르몰루 시계의 유리 돔에 비치고 두 파리가 축 늘어진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느린 사각형을 그리는 공간. 깃털 장식 모자를 쓴 숙녀와 검은 안경을 쓴 그녀의 남편이 부부용 침묵 속에서 다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어, 남편이 프닌 박사의 서재로 갔다. 내가 가정 교사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을 알아챈 것은 그때였다. p.263~264
이 작품은 미국에서 출간된 지 65년여 만에 국내에 초역으로 이번에 출간되었다. 소품이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보코프를 단순한 망명 작가가 아닌 독창적인 작가로 각인시키는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나보코프는 이 작품을 “<롤리타>의 참을 수 없는 마력을 벗어나 잠시 환한 곳으로 탈출하는” 글이라고 언급했고, 자신의 모든 소설 캐릭터 가운데 프닌을 인간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고 한다. 나보코프 연구자 브라이언 보이드는 <프닌>을 “나보코프의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코믹하고 가장 애달프고 가장 단순한 소설”이라고 평가했고,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데이비드 로지는 "“나보코프가 가장 유명해진 책은 『롤리타』이지만 독특하고 독창성 있는 작가로서, 망명 작가가 아닌 미국인으로서 명성을 처음으로 얻은 것은 <프닌>이다.”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점은 나보코프가 이 작품을 구상하기 몇 달 전, <돈키호테>를 다시 읽고 하버드에서 세르반테스에 대해 강의하면서 <돈키호테>의 잔인성에 격노했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돈키호테의 고통과 치욕을 보고 즐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서 <프닌>을 읽게 되면 왜 이 작품이 나보코프가 세르반테스에게 내놓는 답변인지 수긍하게 된다. 시작부터 독자들을 부추겨 소설의 주인공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조롱하게 만들려는 작가의 의지가 다분히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이 이야기는 프닌의 복잡한 내면을 점차 보여주면서 결코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나보코프는 언젠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시간을 들여 친해져야 하며, 훌륭한 독자란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면 다시 첫 페이지로 가서 다시 읽어 보자. 분명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