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사막이 들어온 날
한국화 지음, 김주경 옮김 / 비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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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집요한 질문들에 포위된 느낌이다. 당신은 언제부터 당신의 삶이 이처럼 혼란스러워졌는지, 무슨 이유로 점원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물었는지, 당신이 왜 이 여름에 그토록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지 생각해본다. 어떤 깊숙한 구멍 밑바닥에 빠진 느낌이다. 당신은 온전한 상태가 어떤 건지조차 잘 모른다. 이전의 삶에서 매일 하던 것들, 예전의 습관들은 이제 단지 머나먼 기억일 뿐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이 당신을 자극한다. 심장이 격하게 고동친다.           - '구슬' 중에서, p.77

 

한국인 작가가 프랑스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 출간한 독특한 소설집이다. '모국어의 제약을 벗어나 더 유연한 사고가 가능한 중립적인 영역이 필요했다'는 작가는 프랑스어로 쓴 8편의 소설이 수록된 이 소설집을 프랑에서 출간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저자가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에서 태어나 모국어로 프랑스어를 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이주해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접했을 거라는 점이다. 작가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살아낸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언어와 자신 사이에 어느 정도의 두꺼운 겹이 존재했으며, 이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간결한 문체로 쓰인 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백들이 많았다. 분명 언어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가 시각화되어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고층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황백색의 하늘 한 점,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축축하고 춥고 음산한 방, 눈의 백색이 모든 것을 뒤덮어버린 풍경,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 도시 곳곳을 유령처럼 부유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는 소설들이다. 상상으로 그려낸 도시의 이미지는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딘가에서 무너진 세상을 향해 악몽과도 같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나는 버려진 채로 남아 있는 오래된 망루 꼭대기에서 밤을 보낸다. 그곳은 도시 한가운데 있지만, 이 꼭대기까지 사람이 올라오는 일은 절대로 없다. 틀림없이 예전에는 이 망루가 주변의 어떤 빌딩보다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보다 훨씬 높은 유리 빌딩이나 콘크리트 건물이 주변에 즐비해, 보잘것없는 구조물이 되고 말았다. 이 망루는 더는 불도 켜지지 않고 지키는 사람도 없다. 오늘날 도시는 폐허가 된 이 구조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예 잊기로 작정한 것 같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난 도시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밤의 어둠 속에 감춰진 채로.           - '방화광' 중에서, p.178~179

 

이 책을 읽으면서 도시를 뒤덮은 모래바람 속에서 사막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왜 도시는 사막이 되었을까. 사막은 어떻게 도시로 들어온 걸까. 사람들은 제각각 사막이 들어온 시기를 다르게 기억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강가에 신기루가 나타난 이후라고,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이웃이 죽은 후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항상 언제 이전이거나 언제 이후라고 대답했고, 그들의 의견이 같은 시기를 가리킨 적은 없었다. 도시를 흐릿하게 뒤덮은 모래바람 속에서 여덟 편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화자를 내세우고, 그들의 목소리로 각자의 하루를 살아 낸다. 누군가는 침대에서 수백 명의 죽은 아이들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수수께끼의 도시에서 기이한 하루를 보내고, 온갖 소음과 광기로 가득한 강 건너편의 대도시로 가출하고, 집 안을 가득 채운 소음을 피해 음악 속으로 숨어 들기도 하며, 방치된 망루 꼭대기에서 불꽃놀이를 내려다보기도 한다.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잔상처럼 남는 이 소설들은 그로테크스한 표지 이미지처럼 우리를 특별한 상상력의 세계로 데려간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도시가 사막으로 변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각기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여러 명의 화자들처럼, 이 소설을 어떻게 읽고 느낄지는 각자 다를 것 같다. 한줌의 모래 알갱이처럼 손바닥에 올려 두면 스르르 바닥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여운처럼 남는 독특한 이야기들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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