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타 이슬라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남진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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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일상을 벗어날 일은 없네. 따라서 가족이나 이웃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일 것도 없다네. 스페인에 머물 땐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일 걸세. 그곳에 있지 않을 때는, 글쎄......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겠네. 소설과 같은 허구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싶네. 자네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게 될 걸세. 하지만 이는 일시적이고, 금세 그런 삶을 그만두고 자네 원래 모습으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걸세.          p.96

 

‘세르반테스의 땅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신작이다. <새하얀 마음>과 <사랑에 빠지기>라는 작품으로 만났었는데, 사실적이면서도 어딘가 현실을 넘어선 환상문학같은 느낌과 더불어 일반적인 관념을 뒤흔드는 매력적인 작품들로 기억한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무려 76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두께의 이야기로 비밀정보부의 스파이인 남편과 그가 부재인 시간 동안 남겨진 아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스파이란 원래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라는 전제를 철칙으로 삼는 존재로 때로는 가정을 배제시키고, 때로는 동료까지 의심하며 조용한 전쟁을 치뤄야 하기 때문에 고독과 뗄레야 뗄 수 없다. 게다가 그들에겐 흑과 백의 명확한 논리가 통화지 않는 상황들이 자주 만들어진다.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직업적 특성에 대해서 고뇌하는, 회색 지대의 사람들인 것이다.

 

스파이 문학을 꽤 읽어본 것 같은데, 스파이가 아니라 그의 가족 입장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는 거의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베르타 이슬라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스파이의 아내 시점으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소외를 그려낸다. 함께 있으면서도 눈앞에는 별로 머물지 않으며,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 두 남녀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지만 결코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우리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누구나 각자만의 내밀한 슬픔을 안고 있으며, 어둠에 싸인 자신만의 영역이 필요하니 말이다.

 

 

 

루이스 노발은 그림자이자, 공허한 이름만 가진 유령이었다. 비록 기념물이 있긴 했지만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았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토마스는 더 심한 유령이 될 것이다.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유령. 자식들조차 기억하지 못 할 유령. 자식도 기억을 못 할 텐데 누가 기억을 하겠는가? 풀 한 줄기, 먼지 한 톨, 흩어져가는 안개, 떨어지면서 뭉치지도 못하는 눈송이, 재, 벌레 한 마리, 한 줄기 바람, 결국 스러지고 마는 한 줄기 연기.            p.488

 

베르타는 한동안 남편이 진짜 자기 남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남편을 남편이라 믿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불신이나 죄책감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아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남편은 매번 아내에게 '당신은 모르는 것이 나아'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비밀에 싸인 삶을 강요했다. 뭔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사람과 한 집에 살고 있다는 자각은 삶을 어떻게 바꾸어 버릴까. 토머스는 여러 언어를 유창하고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는 한 번 들은 것은 뭐든 쉽게 이해했고, 별 노력 없이도 쉽게 기억했으며 그것을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재현했다. 이렇게 영리하고, 탁월한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영국에서 공부하던 중 비밀정보부 요원으로 일할 것을 제안받지만 거절한다. 하지만 조작된 사건을 통해 의지와는 별개로 비밀정보부의 스파이로 활동하게 된다.

 

속임수와 배신, 은폐 등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토마스가 스파이라는 역할에 충실할수록 베르타와의 부부 관계는 오해와 갈등으로 균열이 생기게 된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서로를 알았고, 운명적인 확신으로 결혼했지만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남편의 삶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스파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첩보 활동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스파이의 가족과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굉장히 흥미로웠다.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나 사건보다는 감춰진 것들, 숨겨진 이면에 주목한다. 이렇게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면서도 내용 자체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있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문장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방식의 스파이 스릴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과 관계의 본질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깊은 여운을 남겨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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