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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평점 :
바로 그 순간, 그가 말했다. 엘레나,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네요.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되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제가 엄마인가요, 신부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엘레나? 자식을 먼저 앞세운 여자를 뭐라고 부르죠? 저는 미망인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에요. 저는 대체 뭔가요? 엘레나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대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말한다. 제게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신부님. p.99
비가 내린 어느 날 저녁, 엘레나의 딸 리타는 성당 종탑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건은 단순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엘레나는 딸이 절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어릴 때부터 번개를 무서워했던 리타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성당은 물론 그 어떤 피뢰침 근처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엘레나는 안다. 그 아이는 그 근처에 가지도, 거기서 죽지도 않았다고. 엘레나는 딸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스스로 알아내기로 한다. 문제는 엘레나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파킨슨병을 앓는 어머니가 딸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손발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고, 혀가 굳이 말 한마디 내뱉기도 쉽지 않은 엘레나는 누가 딸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전모를 밝혀낼 수 있을까.
작가는 왜 탐정 역할을 육체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로 설정했을까 궁금했다. 하루 동안의 서사는 오전, 정오, 오후로 나뉘어 있는데, 차례대로 두 번째 알약, 세 번째 알약, 네 번째 알약을 먹은 시점의 시간 순이다. 발을 들러 올려 허공에 내디디면서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동작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는 집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가야한다. 시간 별로 약을 먹어야 알약이 녹으면서 몸속으로 퍼져나가 발에 이르고 그제야 그녀의 발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차 시간을 놓칠까봐 불안한 엘라나의 시점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도, 용의자도 없을뿐더러 어떤 범행 동기나 가설도 없이, 오로지 살인만 존재하는 이 죽음의 진실은 뭘까. 엘라나는 힘겨운 여정을 계속한다. 엘레나는 딸에 대해서 자기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였으니까. 비록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을 뿐만 아니라 자주 다투었고, 서로 거리를 두었으며, 심한 말을 내뱉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엄마는 사랑하는 법이다. 어느 누구도 딸에게 생명을 되돌려줄 수 없으며, 죽은 딸이 되돌아 올 수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엘레나는 한 발 또 한 발 힘겹게 내디디면서 걸어간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
부모님한테 받은 걸 되돌려드릴 때가 된 것 같구나. 오래전에 네가 어머니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지금 어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너야. 리타, 이제는 네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될 차례라고. 우리가 아는 엘레나는 이제부터 아기가 될 테니까. 아기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박사님? 엄마가 어떻게 아기가 된다는 거죠? 아기는 귀엽고 예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겪고 있는 건 그와 정반대잖아요. 한번 보시라고요. p.233
사건은 이미 자살로 종결되었고, 딸이 살해당했음을 주장하며 재수사를 요구하는 엘레나의 말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경찰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에는 아무 진전도 없었고, 그래서 엘레나는 몸소 모아온 수사 자료를 담당 경찰에게 넘겨주기 시작했다. 아무도 달라고 하지 않았던 리타의 일기와 주소록,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 네 번째 알약을 먹은 뒤 엘레나는 이사벨이라는 여자를 문득 떠올린다. 이십 년 전 리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았던 여자, 리타에게 큰 빚을 진 여자이니 그녀라면 진실을 대신 파헤쳐줄 수 있지 않을까. 엘레나는 기대를 안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때 진 빚을 갚을 건가요? 이십 년 전 그날 일을 떠올려보면 나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몰라요... 엘레나는 이사벨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의 처지를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사벨은 엘레나가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충격적인 대답을 건넨다. 미안하지만 저는 부인을 도와드릴 수 없어요. 그녀는 평생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이때를 위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미리 준비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차분하게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이 작품은 2022 부커상 인터내셔널 파이널리스트에 올랐고, 곧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로도 공개될 예정이다. 추리소설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사건의 진실과 범인을 밝히는데 치중하기보다는 모녀 관계와 모성에 대해, 여성의 삶과 돌봄의 무게에 대해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사유하며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많은 분량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교차되는 동안 본문 대부분이 문단 구분 없이 한 호흡으로 흘러가며 인물 간 대화는 부호 없이 서술문에 불쑥 끼어들고 있어 읽기에 수월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강렬한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사실적인 묘사와 사려 깊은 사유를 담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매력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