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뉴욕 수업 - 호퍼의 도시에서 나를 발견하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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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사람들이 건물 밖 의자에 기대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그림이다. 그중 네 명은 광활한 평원과 먼 산줄기를 바라보며 이른바 '산멍'을 하고 있지만 화면 맨 왼쪽의 남자만은 무리에 속해 있지 않았다...'꼭 나 같은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나는 웃었다.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책 속 세계에 더 매료되는 사람. 남들이 흥겨워할 때 고요히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무리를 벗어나 길 잃은 양 같은 사람.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 호퍼는 찬란한 태양 아래 세계를 표현하면서도 한 점 고독을 그려넣는 걸 잊지 않았다. 호퍼다운 그림이라 생각했다.           p.52

 

곽아람 작가의 책을 꽤 많이 읽어 왔다. 청춘의 독서를 이야기하고, 절판 아동 도서 수집기로 유년의 독서를 돌아보고, 아메리카 문학 기행 등 책에 대한 책, 독서 에세이를 여러 권 읽었다. 글 쓰는 직장인으로 대학 시절의 공부 여정을 되돌아보는 책도 있었고, 미술사 전공을 바탕으로 그림 읽기에 대한 책도 있었다. 곽아람 작가는 20년차 신문기자이기도 하다. 2003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현재 <조선일보> 최초의 여성 출판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곽아람 작가는 직장생활 중에 주어진 1년간의 해외연수 기회를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보냈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2018년에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고, 이번에 개정판이 나왔다.

 

세월이 흐를수록 뉴욕 생활에 드리웠던 호퍼의 영향이 더 뚜렸해졌기 때문에 이번 개정판에서는 호퍼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가해 고쳐 썼다고 한다. 기존 글을 다듬고, 새로 쓴 글을 추가한데다, 표지 디자인까지 예쁘게 바뀌어서 완전히 새로운 신간을 만나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그녀가 회사 연수차 1년간 뉴욕에서 홀로 생활했던 시기는 서른여덟의 여름 끄트머리와 가을, 겨울, 그리고 서른아홉의 봄과 여름 초입이었다. 어학연수 한번 다녀온 적 없는 30대 후반 여성이 난생처음으로 해외에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좌충우돌 견문록은 매 순간이 수업이었고, '나란 어떤 인간인가'를 배우는 시간들이었다고 한다. 학교도 다니고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과정도 밟았지만, 교실 밖에서도 많은 걸 배웠다고 하는데, 오페라를 보고, 여행을 하고, 혼자 사는 생활을 멈추고 룸메이트들과 함께 살며 미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숙고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자식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견하는 거창한 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게도 독서란 일종의 제의(祭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책읽기란 오래전부터 내게 또다른 세계와의 만남, 일종의 접신(接神)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1년간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곳은 내게 이미 ‘다른 세계’여서 굳이 책읽기를 통해 또다른 세계를 꿈꿀 이유가 없었다. 대신 나는 뉴욕 구석구석을, 서점을, 낡은 책들로 가득한 헌책방을 탐험하며 내면의 성채를 쌓아올릴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책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다녔다.           p.204

 

'괴테처럼 되겠다고 결심하고 머무른 뉴욕에서 정작 내가 만난 건 괴테보다는 호퍼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괴테가 자신의 롤모델이었지만, 호퍼는 그냥 자기 자신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속에서는 대도시의 고독을 주제로 하는 호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는 호퍼와 자신의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림 그림 속 인물을 연상시키는 사람들과 마주치고, 주변 세계에 도무지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뉴욕 생활을 해낸다. 뉴욕에서 지냈던 1년 동안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것들과 부딪히며 온몸으로 체득한 생경한 감각을 모조리 붙들어 매일 같이 글로 썼는데, 이 책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헬스클럽 강좌에 줌바댄스가 있어서 한번 나갔다가 줌바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기도 하고, 방문 연구원으로 있었던 NYU IFA에서 몇몇 미술사 과목을 청강하다가 알브레히트 뒤러에 대한 수업을 듣고는 뒤러의 매력을 알게 되기도 한다. 특히나 그 수업이 진행되었던 강의실에는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두뇌만은 그 어떤 젊은이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지적 열망으로 가득 찬 노인들의 열정도 기억에 남는다. 현대미술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는 뉴욕의 미술 세계를 경험하고 기록한 내용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아트 비즈니스의 현장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모건라이브러리, 뉴욕현대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등 도시 곳곳에 자리한 미술관들을 다니며 작품을 감상한 이야기들도 뉴욕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체감하게 해준다. 일만 하느라 노는 것도, 즐기는 것도, 자신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몰랐던 작가가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난감했던 뉴욕이라는 도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한 뼘 더 성장하게 된 것이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하고 싶은 것은 미루지 말고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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