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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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 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함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p.21

 

사이먼 레이랜드는 런던에 있는 삼촌이 물려준 저택으로 향한다. 동양학자였던 삼촌은 그에게 집과 가구와 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는 이곳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명료함을 얻기로,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지나간 지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삶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에게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고, 그것은 레오나르디 박사의 말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미 그 상황에 대한 것은 끝이 났고, 미래가 그에게 다시 열린 지 6주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레이먼드는 평생 번역가로 살 예정이었지만, 아내가 갑자기 사망하고 출판사를 유산으로 받은 뒤 출판사를 11년 동안 경영해 왔다.

 

 

레이랜드는 삼촌이 그에게 아라비아어로 쓰인 글을 읽어 주었던 대여섯 살 때부터 언어에 매혹되었다. 강압적인 아버지와 학교가 싫어서 가출해 낡은 호텔의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모두 잠든 조용한 시간에 가장 낯선 언어, 가장 낯선 단어를 배우며 그 문학적 매력을 즐겼다. 그렇게 낯선 글자와 단어, 울림과 시의 연들이 그의 몸 안에 차곡차곡 쌓였으니, 그가 번역을 독학하던 숱한 밤을 거쳐 결국 번역가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래이랜드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며, 최근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우리는 알게 된다.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럽게 언어 장애와 마비 증상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뇌졸중이 아닐까 생각하며 병원으로 간다. 다행히 뇌출혈은 아니었지만, 그의 뇌 사진을 보고 의사는 그에게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완전히 없애거나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치료로 조금 늦출 수는 있겠지만 몇 달 혹은 1년쯤의 시간이 그에게 남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그는 다가오는 삶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낯선 시대와 지역에 관한 책을 무더기로 사들이고,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두문불출한다. 왜 이 모든 걸 더 일찍 읽지 않았을까,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 절망하면서,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저항과 광기 속에서 집중력과 기억력으로 무장하고 맞선다. 그러다 그것이 오진임을 알게 되고, 앞으로 남은 생의 첫날을 런던의 저택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내 정신에 새겨졌다고 말하고 싶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텍스트가 많아. 갈고 닦아 잊을 수 없는 언어로 점점 더 넓어지는 내면의 다락방, 그곳에 번역한 언어에 대한 기억이 쌓여갔어. 이런 다락방에만 살면서 평범한 삶의 공간으로 향하는 계단을 더는 찾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어. 어쩌다 그 계단을 내려오면 자연스럽고 자명하게 말하는 법을 잊은 이방인처럼 움직였지. 번역 언어, 특히 복잡한 번역 언어는 상황이 무척 특이해. 그게 내 언어이긴 해. 근원이 내 안에 있고, 그걸 빚고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야. 하지만 타인의 도장이 찍히지. 내 언어는 내 언어지만, 원래 언어는 원래 언어니까.               p.508

 

레이랜드는 방사선과에서 사진이 바뀌는 바람에 시한부를 선고 받았고, 그 오진과 더불어 77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불현듯 다시 미래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생긴 후에는 절대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고, 다가올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라는 걸 그는 깨닫게 된다.

 

"인생은 아름답다. 삶이란 언제나, 매 순간 시작되니까."

 

레이랜드는 책과 원고로 가득한, 천장까지 닿는 책장에 에워싸인 채 13년을 일했지만, 오진을 받고 삶을 정리하며 출판사를 팔아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쉼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오래 전 계획했던 여행을 준비했고, 먼 길을 떠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삶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시간 속에서 그는 죽은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책상 앞에 앉아 그간의 일을 돌아보고, 마침내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누구나 살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다시 세상이 열리기도 하고, 완전한 절망에서 희망을 찾기도 하며, 지금까지 살아 왔던 방식과 다른 세계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그 동안 놓치고 살았던 많은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그 눈부신 순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더 없이 섬세하고, 사색적으로 펼쳐 보인다.

 

이 아름다운 소설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장편소설이다. 현지에서는 2020년에 출간되어 1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유럽 문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파스칼 메르시어를 세계적 작가로 만든 모든 강점이 담겼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직접 읽어 보니 앞으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분량 내내 수많은 작가와 번역가와 출판인, 그리고 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은 이 모든 이들의 삶이 우아한 언어로 그려져 있다. 레이랜드는 수십 년 동안 번역을 해 왔고, 언어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낯선 언어들을 공부해 온 인물이라 언어에 대한 그의 열정이 매 페이지마다 그려져 있는 것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몰타어와 사르데냐어, 베르베르어, 그리스어, 튀르키예어, 히브리어, 그리고 알바니아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등 그는 수많은 언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문학과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게 될 것 같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서 느린 호흡으로 읽어 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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