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의 약국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평점 :

밤에 도서관 앞으로 차를 몰고 지나갈 때, 나는 거대한 전면 유리 앞쪽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움직이는 걸 보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그 묘한 광경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그게 원숭이들이라는 걸 알았다. 사실, 세상의 수많은 도서관이 아무도 모르게 원숭이를 키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도 일종의 비밀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원숭이들은 책을 좋아한다.... 어디선가 들은 얘긴데, 원숭이들에게 책 정리를 처음 맡긴 곳은 중국의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p.86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를 시와 소설에 이어 에세이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라는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났던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이 첫 번째 작품이다. 김희선 작가는 핀 시리즈 소설로도 만난 적이 있는데, 시리즈 스물아홉 번째 작품으로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팔곡마을의 노인들과 이들을 찾아 나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 만연한 노인 혐오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품이다. 사실 김희선 작가를 처음 만났던 건 아주 오래 전 <라면의 황제>라는 소설집이었다. 당시에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세상을 둘러보면 곳곳에 숨어 있는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합체 같다고 생각했었다. 다소 황당하고, 생뚱맞아 보이는 소재로 세상에 대해 시시콜콜 오지랖을 펼치는 작가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웠지만 유쾌했고, 어이없었지만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김희선 작가가 낮엔 약사로, 밤엔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글을 보고 그런 독특한 이력이 특유의 상상력과 허구와 실재가 뒤섞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했었다. 이번에 만난 작가의 에세이는 기존 작품들을 통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작가가 그려내는 따뜻한 시선으로 빛을 밝히는 밤의 약국 이야기는 약사가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주듯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우리 동네에도 구불구불한 골목 한 켠에 할머니 약사 한 분이 운영하는 약국이 있다. 근처에 있던 편의점이 문을 닫고 나자, 밤이 되면 어두운 골목을 유일하게 비춰 주는 따스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실제 김희선 작가가 약사로 근무하는 약국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만든 빵은 옥수숫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어 구운 진짜 시골식 빵이었는데, 집 밖에 불을 피워놓고 널빤지 위나 집 지을 때 잘라 쓰고 버린 나무토막의 한쪽 끝에 올려놓고 구운 것이었다."
어려서 처음 본 <월든>의 이 문장을, 난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찾아 읽곤 했다. 마치 페이지 어딘가에 무형의 옥수수빵 혹은 빵의 영혼 같은 게 있어서,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것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여 내 안으로 들어온 빵의 영혼이 마음을 채워주고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구석구석 퍼져나가 몸 전체를 데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p.145
인적이 드문 길모퉁이에 홀로 불을 밝히고 선 가게가 있다면,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에 어두운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등불처럼 느껴질 것이다. 물론 벽과 유리로 둘러싸인 내부만 따뜻해 보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소외감과 고독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위로와 희망의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길 잃은 사람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 주고, 아픈 사람에게는 편한 밤을 선사하는 약이 되어 주기도 하고, 갈 곳 없어 방황하던 사람에게는 한 줌의 휴식 같은 공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실제로 밤에 불이라곤 다 꺼진 쓸쓸한 거리에서 혼자 빛을 밝히고 있는 약국이 어찌나 등대 같았던지, 한때 나라에선 약국마다 문 앞에 '청소년 지킴이 시설'이라는 작은 표지판을 붙이게 한 적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때 연금술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급의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작가의 고백을 시작으로 기차역에 살던 꿩이 '역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게 되었던 이야기, 조제실 옆 책장에 '독버섯 도감'을 갖다 놓았던 이유, 말하는 앵무새 인형과 할머니, 죽은 돌고래의 꿈, 둥지에서 떨어진 까치를 구조했던 일, 함께 지내고 있는 반려 동물 거북의 하루, 박스맨이라는 도시 전설 등등...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는 말처럼 세상의 구석구석들을 두루 살펴보고, 어루만져주는 다정한 글들이 이어진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글은 '빵의 이데아에 관하여'라는 글이었는데, 빵이 주는 온기와 영혼에 한 번 새겨진 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는 말에 너무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괜스레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건, 세상의 모든 빵덕후들에게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에세이는 그저 매일같이 사는 게 바빠서 무심코 지나치거나, 뭐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무시하거나, 못 본 척 지나치거나, 아는 것처럼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어질 핀 시리즈 에세이 선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