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이는 물결 - 작가, 독자, 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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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픽션, 즉 18세기 이후의 장편과 단편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를 제공한다. 픽션이 실제로 겪은 경험보다 훨씬 더 유용할 때가 많다. 시간이 훨씬 적게 걸리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으며(도서관을 이용하면 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돈된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픽션을 이해할 수 있다. 경험은 증기 롤러처럼 우리를 휙 깔고 지나간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그것이 어찌 된 일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p.79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높은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가이기도 한 르 귄은 소설만큼이나 훌륭한 산문집을 쓰는 걸로도 유명하다. 글 속에 세상을 살아온 그 시간만큼의 사유와 고뇌와 혜안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88년부터 2003년까지 15년간 문예지 등에 발표해온 에세이, 문학 작품집의 해설과 서문 및 글쓰기 워크숍 강연 원고 등을 새롭게 손보아 내놓은 것으로, 2005년 베스트 논픽션 부문 로커스상을 수상했다. 특히나 어슐러 K. 르 귄이 이 선집을 위해 새롭게 집필한 글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30편의 에세이는 각각의 성격에 따라 ‘개인적인 문제들, 독서, 토론과 의견, 글쓰기에 대하여’의 네 개 범주로 나누어 묶었다. 제목인 '마음에 이는 물결'은 의식의 흐름과 글쓰기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은유에서 가져왔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평, 글쓰기와 읽기라는 예술에 관한 르귄의 성찰이 매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책을 읽는 독자는 그 책을 만들어간다. 임의적인 상징과 인쇄된 글자를 자기만의 내적인 현실로 번역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독서는 창조적인 행동이다.... 독서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적극적인 거래다. 텍스트는 독자의 통제하에 있다. 독자는 텍스트를 건너띌 수도 있고, 한 곳에서 머뭇거릴 수도 있고, 텍스트를 해석할 수도 있고, 오독할 수도 있고, 앞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고,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그 판단을 수정할 수도 있다... 소설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활발히 진행되는 협업이다.         p.442~443

 

어슐러 르 귄을 작가로 만들어 준 데는 도서관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장을 보러 간 동안 오빠와 함께 단어를 찾아 다니는 미사일처럼 도서관의 어린이 방을 돌아다녔던 기억부터 아이들을 위한 책을 모두 섭렵하고 나서 어른 방으로 몰래 들어갔지만 사서들이 모른 척해주었던 추억, 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싫어했던 것만큼 좋아했던 도서관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던 외서 구역에서 사랑이 크면 알지 못하는 언어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걸 깨달았던 나날까지. 굶주린 것처럼 책을 읽던, 읽고 또 읽어서 줄줄 외울 정도로 책을 사랑했던 어린이가 자라서 위대한 작가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이렇게 개인적인 회상부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평, 글쓰기와 읽기라는 예술에 관한 성찰 등 다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톨스토이의 위대한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불행하다'에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었다. 르 귄은 톨스토이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그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나이가 60대에 접어든 뒤에는 남을 존경하는 능력이 많이 줄었다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톨스토이를 위대한 작가로서 존경하지만,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이런 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사정없이 지적을 하며, 그에 대한 무례한 질문들을 조용히 던져댄다. 그 동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의문들과 소리 없는 이의들이 마치 포도주가 숙성되는 것처럼 성숙해지고, 강해져서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톨스토이의 유명한 문장이 거짓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소설'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르 귄의 이 글을 읽다 보면 오히려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싶어지는데, 어쩌면 그것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도 <반지의 제왕>의 리듬 패턴, 각종 산문의 운율 분석과 강세 패턴 실험 등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상상력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독서가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장르 문학과 판타지가 어떤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지 궁금하다면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산문집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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