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문구점 아저씨 - 좋아하는 일들로만 먹고사는 지속 가능한 삶
유한빈(펜크래프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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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에 부의 상징으로 통하던 펜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파이롯트 하이테크’ 되시겠다. 아마 다들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센세이션하고 엘레강스하며 럭셔리하고 뷰티풀한 펜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같은 회사에서 쥬스업이라는 볼펜(내가 생각하기에 하이테크의 완벽한 상위 호환 버전이다. 잉크 발색도 더 뛰어나고 색상도 다양하고 내구성도 좋고 노크식이라 쓰기도 간편하다. 그립부엔 고무가 덧대 있어 그립감도 좋다)이 나와서 그런지 대형 문구점에 가봐도 예전처럼 하이테크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p.35~36

 

어린 시절에는 동네 곳곳에 보이던 것이 문구점이었는데, 요즘은 알파문구나 링코 등 대형 체인점 조차도 찾기가 어려워졌다. 대부분 온라인 몰을 통해서 문구를 주문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동네 문구점은 그야말로 버틸 수가 없는 구조일 것이다. 그 와중에 문구점 창업기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주인 아저씨가 문구 덕후로 긴 시간 노트 덕질을 하다가 도저히 마음에 드는 노트를 찾을 수 없어서 직접 '제작'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망원동 초등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동백문구점'에는 초등학생이 쓸 문구를 팔지 않는다. 오히려 다 큰 어른들이 쓸 문구를 파는 곳인데, 굳이 초등학교 앞에 매장을 구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암막커튼과 조명, 사방이 노트들로 가득 찬 서재 같은 느낌의 문구점이라니... 근처 초등학생들이 들어 왔다가 깜짝 놀라 다시 나갈 것만 같다. 특히나 커튼 덕분에 가게가 문을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알기도 어려운 조용한 문구점이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닫힌 가게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어떤 날은 하루에 한 명도 안 오는 문구점을 운영하는 주인장에 대해 궁금해졌다.

 

 

 

간판은 없다. 아는 사람만 올 수 있다. 비밀의 장소 같은 곳이다. 인스타그램에 기존엔 없었던 색다른 공간이 있다는 소문이 난다.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입구가 어딘지 찾지 못하고 주변에서 헤맨다. 우여곡절 끝에 공간에 들어오자 밝았던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한 분위기. 카운터로 보이는 곳 쪽에 대형 샹들리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사방에는 고재(빈티지 우드)로 만든 책장이 가득하다. 딱 봐도 나이가 이백 살은 돼 보인다.          p.187~188

 

이 책의 저자이자 동백문구점을 운영하는 그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펜크래프트’라는 활동명 관련 책을 집필하기도 했고, 온오프라인으로 글씨 교정 강의를도 진행한다. 매일같이 책을 읽고, 필사하며, 활자뿐만 아니라 활자를 쓰는 도구인 문구류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 담에 크면 문구점 아저씨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어 꿈을 이룬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자라는 것도, 게다가 그 꿈을 이루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의 '덕업일치'와 아날로그 라이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새삼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리고, 여유있게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는 것도, 좋아하는 것에 진심인 마음으로 문구를 직접 제작하고, 문구점을 창업하고 운영하는 것도 모두 말이다.

 

저자가 펜크래프트로 활동하게 된 과정도 매우 흥미롭다. 전설의 포켓몬처럼 느껴졌던 몽블랑 만년필을 구매하고 나서, 없는 살림에 산 거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최대한 정성 들여 글씨를 썼는데.. 몽블랑 만년필의 품격에 걸맞지 않은 초등학생 글씨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글씨 연습은 결국 좋아하는 책의 내용을 베껴 쓰는 '필사' 연습으로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손글씨 강의까지 하게 되는 수준이 된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좋아했을 뿐인데, 그것이 결국 직업이 되고, 삶이 되는 경우라니.. 너무도 근사했다. 손글씨, 편지, 종이책, 레코드.. 모두 불편한 것들, 아날로그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이다. 패션조차 구식을 좋아한다는 저자의 아날로그 라이프는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데서 오는 특유의 감성이 있는 것 같다. 문구를 좋아하는 덕후라면, 아날로그 라이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자신 안에 숨어 있던 내면의 덕후 기질을 이 책을 통해 꺼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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