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후루우치 가즈에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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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는 건 언제든 비참한 법이야. 지금도, 옛날도. 지금은 전쟁 중인 세상하고는 전혀 달라도 너희에게는 너희만의 힘든 일이 있겠지. 하지만 난 그 사람이 보여준 아름다움을 마음에 쭉 간직하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시게루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인생은 고생스러운 법이란다. 그러기에 더더욱 단것이 필요하지.”
그러면서 스즈네의 눈앞에 팥 찐빵 접시를 내밀었다.         p.212

 

스즈네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잔호텔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동경하던 애프터눈티 기획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원래 애프터눈티를 담당하던 선배가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인데, 꿈에 그리던 부서에 왔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고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보지만 파티시에 다쓰야에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마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여전히 노력 중이다.

 

 

오잔호텔은 애프터눈 티 붐의 선구라고 할 만한 존재로, 매체에도 여러 번 소개가 되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최근에는 혼자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도 늘었는데, 새로운 애프터눈 티가 나올 때마다 혼자 라운지를 찾는 단골들이 있다. 회사원 스타일의 중년 남성과 역시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여성이다. 이들은 라운지 직원들 사이에서 '솔로 애프터눈 티의 달인'이라고 은밀히 불리는데, 한 입 먹을 때마다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곤 해서 지켜보던 스즈네까지 기뻐하게 만드는 손님들이다.

 

 

원래 애프터눈 티의 유래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한 귀부인의 배고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 귀족의 식사는 하루에 두 번뿐이었고, 아침 식사 후 밤 8시부터 시작되는 저녁 만찬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나 종일 코르셋을 입고 있어야 하는 여성은 가볍게 간식을 먹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홍차와 과자로 티타임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 침실의 '은밀한 다괴회'는 순식간에 여성 귀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점차 화려하고 호화로운 차 모임이 되어간 것이다. 그러니 애프터눈 티는 사교 목적뿐만 아니라,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것 또한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과자는 결코 필요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즐겁고 아름답다. 앞으로도 향기로운 차와 보석 같은 과자를 즐기는 애프터눈 티의 시간은 힘겨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에 색채를 더해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겉모양이 예쁜 가토나 귀여운 프티 푸르의 단맛을 돋보이게 하려면 짜디짠 소금 약간이나 씁쓸한 술이 소량 필요하다니, 세상은 이 얼마나 만만치 않단 말인가.       p.330

 

애프터눈 티, 은색으로 빛나는 3단 트레이에 담긴 귀여운 마카롱과 타르틀레트 등의 프티 푸르, 갓 구운 스콘, 손가락 크기의 고급스러운 샌드위치까지.. 향기로운 홍차와 함께 대접받는 우아하고 화려한 궁극의 간식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애프터눈 티세트를 종종 즐기러 가곤 했다. 웬만한 식사 비용보다 더 비싼 가격의 디저트이지만, 눈으로 보는 것도 즐겁고, 맛은 더 훌륭하고, 천천히 다양한 디저트를 맛보며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애프터눈 티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을 연출해내는 화려한 판타지라는 점도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 파는 애프터눈 티세트는 대부분 2인 이상을 기준으로 판매되고 있어서, 한 번도 혼자서 즐길 생각을 못해본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사실 애프터눈 티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굉장히 놀라웠다.

 

 

이 작품은 호텔의 애프터눈티팀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그곳을 찾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계절에 걸쳐 아름답게 변하는 호텔 정원 묘사도 근사하고, 호텔의 명물인 애프터눈 티에 대한 묘사는 그 향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다. 평소에 선뜻 낼 만한 가격은 아닌 사치스러운 간식이지만, 그러기에 열심히 애쓴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너무도 공감되었고, 그 속에서 신 메뉴를 개발하고, 각자의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뭉클한 작품이었다. 계약직 직원과 정직원의 관계, 일과 육아 사이에서의 고민, 보이지 않는 차별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세심하게 그려내면서도 힘든 일상을 위로해주는 크고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는 따뜻한 작품이기도 했다. '단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보는 시간과 여유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휴식 같은 힐링을 안겨줄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덧.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즐겼던 애프터눈 티 사진들을 찾아 보았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2019년 11월30일이었으니, 코로나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거리두기 중에도 가려고 마음먹었다면 갈 수 있었겠지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거리두기도 끝이 났고, 차츰 일상이 회복되고 있으니.. 조만간 나를 위한 근사한 선물로 애프터눈 티를 즐기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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