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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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가르쳐줄까?” 처음으로 만난 해, 미카는 말했다. “사실은 엄마와 같이 살고 싶어. 기슭의 아이들처럼.” 중대한 비밀을 전하는 것처럼. 애초에 부모와 떨어져서 살아가는 배움터의 아이들은 노리코와 달리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것을 쓸쓸하다고 생각하거나 가엽다고 생각하는 쪽이 실례라고 노리코는 생각했었다. 그것을 그대로 전하자 미카는 미소 지었다. “그래?” 하고.
“쓸쓸한 건 쓸쓸하고, 슬픈 건 슬퍼.”
어떤 표정이었는지 안다.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잔혹하다. 미카의 얼굴은 확실히 떠오르지 않는다.     p.16

 

미래 학교라고 불리는 단체 시설 부지에서 여아의 백골 사체가 발견된다. 정식 학교 법인은 아니었지만 많을 때는 100명 가까운 아이들이 생활했었고, 그들 대부분은 미래 학교의 이념에 찬동하는 부모의 아이들이었다. 발견된 백골 사체가 자신의 손녀가 아닌지 확인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변호사 노리코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매년 미래 학교에서 여름방학의 일주일을 보냈었다. 여름방학 캠프 형식으로 외부의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에게도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문답을 통해 사고력을 기르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노리코는 잊고 있었던 30년 전 그 여름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본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여름학교에서 발견된 백골이 당시 친구였던 미카의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에 자리 잡고 있는 대안교육시설인 미래 학교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신흥종교시설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내부에서 생활하던 아이가 백골 시체로 발견이 되었으니, 그 죽음이 살인이나 학대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까, 학교 측에서 죽음을 은폐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분분했던 것이다. 과연 어린 소녀의 죽음은 사건인가, 사고인가. 30년 전 여름에 있었던 ‘그 사건’의 진상은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순간, 노리코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쩍였다. 노리코가 시게루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큰애가 하루카, 작은애가 가나타."
통렬하게 가슴이 옥죄어왔다.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너무나도 큰 아픔에 놀랐다.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남매의 이름. 그 이름을 붙여준 부모의 바람을 알기 때문이었다.          p.552

 

외부인들에게는 신흥종교시설처럼 보이는 대안교육학교에서 발견된 소녀의 백골사체에 대한 미스터리는 대부분의 추리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진행된다. 실제로 미래 학교라는 곳이 뭔가 수상한 곳이라는 의심을 독자들이 하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시작되고 150여 페이지가 지난 다음이다. 그 전까지는 소녀들의 시선으로 풋풋하고 두근거렸던 여름 학교의 추억이 그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뭔가 수상쩍게 느껴질 수도 있는 미래 학교이지만, 그 속에 있던 아이들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그곳 풍경은 여름의 태양과 지저귀는 새들, 숲속 오솔길, 그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신비한 샘으로 기억되는 설레이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누군가의 비밀, 샘에 비는 소원, 첫사랑과 우정, 그리고 쓸쓸함과 슬픔, 마음이 둥실 부풀어 오르던 순간들과 깊은 안도감, 다정한 유대로 가득한 추억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내가 믿고 있었던 '진실'과 어른이 되어 다시 바라보게 된 '기억'이 같지 않다면 어떨까. 과거의 자신은 그저 어른들이 구축한 세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고, 알고 있던 것들이 실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면 말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게 마련이지만, 사실 그 시간을 체감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 많다.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 가느라, 매일 하루치의 삶을 견뎌 내느라,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호박에 갇힌 곤충 화석처럼, 시간을 멈추고, 추억을 결정화하고 하게 된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시간은 흘렀을 텐데, 이미 그 곳으로부터 멀어진 나에게 그들은 시간 속에 박제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츠지무라 미즈키는 너무도 세심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내어 그들에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 모두 한 때 겪었던 시기인 유년시절부터, 그 아이가 어른이 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는 삶의 순환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아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이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눈부시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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