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 언어생활자들이 사랑한 말들의 세계 맞불
노지양.홍한별 지음 / 동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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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번역을 할 때 그런 게 정말 어려운 것 같아. 최대한 한국어처럼 읽히게 자연스럽게 옮기려하다 보면 담대한 시도는커녕 지나치게 길들여 동글동글 순한 자갈돌들만 남겨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출발어와 도착어가 만날 때 서로 다른 언어 체계와 문화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충격, 단층, 균열이 그 특별한 만남의 흔적으로 글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냐는 거지. 모난 돌들이 글을 읽는 우리의 살갗에 거슬리고 낯설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가슴에 상처를 내고 언어 감각에 사라지지 않는 압흔을 남길 수 있는 것도 그 모난 돌들일 테니까.        - 홍한별, '다시 쓸 용기' 중에서, p.101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 <트릭 미러> 등의 작품들을 번역한 노지양 번역가와 <클라라와 태양>, <도시를 걷는 여자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등의 작품들을 번역한 홍한별 번역가가 만났다. 이 책은 동녘에서 펴내는 편지 시리즈 ‘맞불’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마주보며 타오르는 불처럼, 두 작가가 주고받는 대화가 피워내는 빛나는 이야기들을 담겠다는 취지만큼이나, 정말 멋진 작품이 나온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두 번역가의 서간 에세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기대를 했었다. 노지양 번역가의 첫 번째 에세이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도 재미있게 읽었고, 최근 번역작인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고착>도 너무 아껴가며 읽었기에 이제는 믿고 보는 번역가이자 작가이다. 홍한별 번역가는 아직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을 출간한 적은 없지만, <피시본의 노래>, <밀크맨>, <해방자 신데렐라> 등 꾸준히 번역본으로 만나왔기에 이번 책이 더 궁금했다.

 

 

 

우리 번역가의 하루는 대체로 아무 교류도, 사건도 없고 마치 정지 화면처럼 고정되어 있지만 마음속에선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지. 주인공이나 저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미워지기도 하고, 일 때문에 기분이 하늘을 날았다가 급격히 바닥을 치기도 하고, 난제를 만나고 고뇌를 하지. 아무리 홀로 고요히 일을 한다 해도 평정심은 쉽게 찾아오거나 유지되지 않더라. 그래서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면서 나의 감정을 관리하는 것도 번역을 잘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 어떤 아픔이나 좌절도 시간이 상당 부분 치유해준다는 사실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 노지양, '심장으로 옮긴 문장' 중에서, p. 248

 

번역이라는 것이 얼핏 지적 노동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키보드를 두르리고 창 사이를 오가는 단순 노동이 상당 분량 차지한다고 한다. 원문 파일, 번역문 파일, 사전 검색을 할 수 있는 웹 브라우저 이렇게 최소 세 개 창을 동시에 띄워놓은 상태에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앉아 있어야 하는 작업인 것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이라는 것이 번역가의 개입이 많을 수록 매끄럽게 읽히기 마련인데, 따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번역가의 판단으로 낯선 외국어만의 매력을 사라지게 하는 건 아닌지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데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에 대해 더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 다양한 번역가들의 에세이가 있어 왔지만, 대부분 번역 외적인 부분을 다루었었는데 이 책은 번역 작업 자체에 대한 사유가 주를 이루고 있어 너무 좋았다. 글쓰기로서 번역의 위치, 번역가의 개입 영역, 번역가들의 근원설화, 번역료와 번역가의 수입, 번역과 시간의 관계 등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좋아하는 책을 옮긴다는 행복과, 의미와 감정이 제대로 옮겨지는 건지에 대한 의심과 함께 찾아오는 고통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번역가들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우리가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쓰인 훌륭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분들 덕이기도 하니 말이다. 앞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을 만나면, 꼭 옮긴이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보았다.

 

동녘의 ‘맞불’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청년의 시각으로 질병과 장애를 섬세하게 분해하는 안희제X이다울, 에코페미니즘과 동물권을 종횡무진 사유하는 이라영X전범선, 수면 아래 잠긴 여성의 우울과 자살을 건져 올리는 서울대 의료인류학과 이현정X《미쳐 있고 괴상하며 우울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하미나의 편지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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