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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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엌, 그 창문, 그 안뜰. 그것은 엄마가 뿌리를 내린 대기였고 엄마가 서 있던 배경이었다. 이곳에서 엄마는 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쳤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는 당신을 둘러싼 환경을 경멸했다... 엄마는 여기 아닌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p.25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는 문학비평, 특히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 작가, 비비언 고닉의 작품이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정말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굉장한 책이었다. 온갖 찬사를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좋았다. 중년의 작가가 노년의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거닐며 담소하고, 회상하고, 언쟁하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삶에 대한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들로 인해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작품이었다.

 

비비언 고닉은 뉴욕 브롱크스의 다세대주택에서 여섯 살 때부터 스물한 살 때까지 살았다. 스무 채의 빌라가 있는 4층 건물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모두 상스럽거나 외고집이었고, 행동만 보면 세상사를 다 꿰고 있는 듯했다. '약삭빠르고, 즉흥적이고, 무식하고,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이었다고, 그녀는 당시를 기억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시기는 잠시였고, 자주 충격적이고 야만스러운 사건들이 터지곤 했던, 노동자 계층, 대도시의 한구석에서 북적대서 살아가던 일상들이 페이지마다 가득 펼쳐진다. 엄마는 능숙한 요리사였고, 맹렬한 청소부였으며, 악령들린 세탁부로 살림을 쉽게 척척 해냈지만, 그것들을 지긋지긋해하며 딸에게는 집안일을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고, 끊임없이 평가하며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아마도 비비언 고닉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타협하지 않는 글쓰기는 그녀의 엄마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정한 모녀는 결코 아니었다.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p.300~301

 

남편의 요구로 일을 그만두고 오로지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아 왔던 엄마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다. 평생 가지고 누려본 거라곤 남편의 사랑뿐이라고 믿었기에, 그의 죽음 이후 작정하고 헤어날 수 없는 슬픔 안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만, 엄마의 삶은 필연적으로 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비비언 고닉은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고 말하며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엄마와 딸의 관계란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어디에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비언 고닉의 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희미하게 짐작했던 것들을 구체화시켜서 바로 눈 앞에 들이미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지독할 정도로 솔직하고, 어떤 미화도 없이 적나라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는데, 매 순간 심금을 울린다. 놀랍도록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독창성으로 기어코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자전적 글쓰기의 전범이자 고전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글항아리에서 비비언 고닉 선집으로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끝나지 않은 일>도 곧 나올 예정이니 이 엄청난 작가를 만나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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