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레모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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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의 자극성이란, 대개 만들어진 자극성이거든. 아무리 비극의 장소라고 해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자극적이기란 쉽지 않지.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에 무슨 자극성이 있겠어? 그런데 이 렘차카를 둘러보니, 아직 므레모사에 살고 있다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자극적으로 포장할 요령을 익히지 못한 듯해. 이렇게만 해서는 곤란하다는 걸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만."        p.63~64

 

서쪽으로는 거대한 산맥을 등지고 있어 접근이 차단되어 있고, 동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게이트를 통과해야 하는 군사 특별 구역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어느 날, 그 고립된 지역에 위치한 공장과 연구소에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고, 이후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유독성 화학물질들은 인근 도시들과 농작지와 식수원을 초토화 해버렸고, 순식간에 수십 만 명이 살던 터전을 떠나 그곳은 인간이 밟을 수 없는 지역, 완전한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다.

 

 

그렇게 유령마을이 되어 버린, 이르슐의 므레모사에 출입이 허가되었고, 첫 투어에 당첨된 여행객들이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그곳으로 향한다. 교토대에서 관광학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 이시카와 유지, 열 개의 직업을 거쳐 은퇴한 후 10년 정도 비극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중인 헬렌, 펍을 운영하다 망하고 투어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레오, 태국에서 온 언론사 신입 기자 탄, 회사를 운영하다가 쉬고 있다는 유안, 남동생과 여행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는 주연, 이렇게 6명이 수십 년간 공꽁 감춰졌던 장소에 첫 손님으로 가게 된다.

 

므레모사의 첫 투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이유는, 끔찍한 비극 이후 죽음의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 그 귀환자들의 신체가 좀비처럼 끔찍하게 변이되었기 때문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과연 수십 년간 감추어져온 외진 마을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을 제 바로 찾아온 이들 여행자들의 목적은 뭘까.

 

 

나는 나의 고통을 팔아서 생존했고, 때로 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모멸감을 잊기 위해 더 많이 도약해야 했다. 나는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은 강인해요. 당신의 움직임이 나에게 영감을 줘요. 어느 순간부터는 한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더는 아름답지도 강인하지도 않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이따금 궁금했지만 그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질문도 그만두었다.          p.168~169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서른여덟 번째 작품은 김초엽 작가의 <므레모사>이다. 김초엽 작가의 첫 SF호러 소설인 이 작품은 2021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것이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후 굉장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작년 한 해에만 <사이보그가 되다>, <놀이터는 24시>, <지구 끝의 온실>, <방금 떠나온 세계>, <행성어 서점>으로 만났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김원영 변호사와 공저했던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었었다. 과학을 전공한 소설가 김초엽과 사회학,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 김원영이 각기 보청기, 휠체어라는 테크놀로지와 밀접하게 결합하여 살아온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도,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여성과 보여지는 장애를 가진 남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 <므레모사>의 주인공 유안은 환지증에 시달리는 전직 무용수로 등장한다. 그녀가 다리를 잃게 된 과정 자체는 자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 이후의 고통과 금속 다리를 지닌 채 살아가는 삶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신경 의족을 분리한 상태에서도 예전 다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지증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환지증 역시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장애이고, 고통이라 김초엽 작가이기에 이렇게 세심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극중 유안의 마지막 선택이 가져오는 의외성이 잔상처럼 오래 남는 작품이었다.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라기 보다는 가까운 현재의 그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팬데믹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세계를 확장하고 변화시키는 김초엽 작가의 다음 발걸음도 기대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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