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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고백 - 여자도 사람이외다 ㅣ 이다의 이유 3
나혜석 지음, 조일동 옮김 / 이다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 조선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에 대한 제일 중요한 것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즉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생명이 있다.’ 하는 것을 억제하고 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 숨소리를 들어보시오. ‘여자도 사람이다.’ 하는 자부심이 이상스럽게 전신에 흐르리다. 이렇게 여자의 눈이 뜨일 동시에 지금까지의 자기가 불행했고 불쌍했던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불행인 역경에서 행복인 순경으로 옮기려는 본능에 따라, 여자 자신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아갈까 고심하게 될 것입니다. p.89
우리 시대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명저를 선정해 출간되는 '이다의 이유'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였고, 여성의 주체적 권리와 인권을 펼친 운동가였던 나혜석 편이다. 이 책은 나혜석의 산문과 대담, 논평 가운데 여성권을 비롯해 진보적인 관점에서 쓰고 밝힌 것을 묶었다.
나혜석은 신여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배웠고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촉망받는 화가이자 작가였으며, 한 가정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에게는 시대와의 불화가 함께했다. 아내이자 어머니였지만 인형이 되기를 거부했고,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했으며,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를 외쳤던, 나혜석의 문제의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깨물어 부수는 일이 적지 않소이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p.179~180
이 책에 수록된 글들 중에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모(母) 된 감상기〉이다. 나혜석은 이 글에서 어머니가 되는 과정과 심정을 말하며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이 글은 어머니가 되는 과정과 모성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였는데 그걸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원통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분만 이후의 과정도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데, 잠 오는 때 잠자지 못하는 자의 불행과 고통부터 천신만고로 양육하려해도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고 구박하는 환경, 다른 모든 것에는 시간을 바칠 여가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자식의 필요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이런 말을 했으니, 당시에 나혜석이 가정과 사회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고립되었을 지는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여성의 현실은 이 글이 쓰인 1922년이나, 내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2022년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점도 우리가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나혜석은 이후에도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을 발표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정조 관념을 강요하는 사회와 부딪쳤으며, 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고자 한 바람을 끊임없이 실천했다. 이제 시대는 많이 달려졌고,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었지만 우리는 백 년전 나혜석에게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혜석의 글들을 되짚어 보고, 그녀의 삶을 돌아보며,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로서 매일을 살아가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