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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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뒤덮은 초록은 진정한 죽음의 빛깔이다. 흔히 생각하듯, 죽음은 하얀색도 검은색도 아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초록.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하는 듯, 불안하고 숨 막힐 듯 답답한 느낌이 들면서도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거대한 덩어리. 그 안에서 약자들이 강자들을 떠받치고 있는 반면, 거대한 것들은 작고 힘없는 것들로부터 빛을 빼앗는다. 거기서 거인들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미세한 것들뿐이다. 그런 밀림 속에서 32명의 아이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인간 고유의 저항력을 증명하며 살아남았다.        p.107

 

스페인 작가 안드레스 바르바의 작품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거라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지만, 21세기판 <파리대왕>이라는 점에 호기심이 생겼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의 모험담으로 문명적 질서가 어느 순간 집단적 광기에 휩싸여 다 무너지고, 야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그렸던 작품이었다. 소년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파리대왕>에 비해, 안드레스 바르바의 <빛의 공화국>은 반대로 밀림에서 자란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갑자기 도심에 나타나 벌어지는 일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야기의 화자는 막 승진해서 산크리스토발의 사회복지과로 발령을 받은 젊은 공무원이다. 산크리스토발은 거대한 밀림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소도시였다. 높이 쌓아놓은 나무 방벽처럼 보이는 진초록빛의 밀림과 폭이 4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물길의 에레강 등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지만, 현실은 아열대 지방 특유의 권태가 만연한 지방의 도시였다. 그리고 그곳에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32명의 아이들이 나타난다. 아홉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이 아이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어떤 언어로 말을 하는 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슈퍼마켓을 습격하고, 가게 영업을 방해하고, 돈을 훔쳐 달아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등 도시를 혼란에 빠뜨린다.

 

 

 

"가령 말이죠, 우리 삶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을 처음 만나면서 어떤 신호 같은 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신호를 말하시는 거죠?" 마이아가 물었다.
"그렇다고 꼭 물질적인 것은 아니에요. 그런 것이 빛이나 소리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기는 해요. 그 사람이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심에 속하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무엇. 뭐 그런 거죠."     p.192~193

 

꾀죄죄한 얼굴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는 거리 곳곳에서 출몰하는 아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이런 저런 추측을 해대지만, 정확한 사실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점점 아이들은 폭력적이 되어가는데,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모습을 감춰 버린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말이다. 경찰이 아이들을 찾아 밀림을 수색하는데, 진짜 문제는 아이들이 사라진 뒤부터 시작된다. 도시의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슈퍼마켓 습격 사건 이후, 많은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길어지는 침묵과 식욕부진부터 32명의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겠다고 땅바닥에 귀를 대기 시작한 것이다. 32명의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체 이들의 정체는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로 종적을 감춰버린 것일까.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불안감은 사라질 것인가.

 

윌리엄 골딩의 작품을 떠올리고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시점이 아니라 외부인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파급 효과가 더 놀랍게 전달이 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극중 '어떤 것이든 일단 믿기 시작하면 그 어떤 현실보다 더 진짜처럼 보인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렇다면 눈으로 본 것은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순수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세계와 삶이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된 어른들의 세계가 교차하는 놀라운 작품을 만나 보자. <파리대왕>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고, 이 작품 자체 만으로도 흥미로운 환상문학으로서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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