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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평점 :
나는 과거의 그때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1939년의 일을 쓸 때면 나의 모든 증오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증오는 사랑이 작동시키는 분비샘과 동일한 분비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심지어 사랑이 초래하는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배우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질투 많은 유다였는지 아니면 비겁한 베드로였는지 그들의 행동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p.47~48
소설가인 밴드릭스는 유부녀인 세라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헤어진 이후 1년하고도 6개월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더 어느 비오던 밤 세라의 남편인 헨리와 우연히 마주친다. 오랜만에 만난 밴드릭스에게 헨리는 아내의 일로 걱정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한다. 헨리는 세라가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는 것 같다며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고, 이에 호기심과 질투에 사로잡힌 밴드릭스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그녀의 뒷조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래 전 그녀의 갑작스러웠던 이별 통보 뒤에 숙며져 있던 뜻밖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밴드릭스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1939년의 첫 만남부터 1944년 런던이 공습받은 날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기까지의 이야기와 1946년 현재가 교차 진행된다. 사랑이 시작되고, 타오르다 사그라들고, 끝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시간까지 모두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는 서두에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워할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하기도 한다. 사랑과 질투로 시작되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슬픔과 분노로 버무려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행복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옹졸하고 변덕스러운 민낯을 보여주기도 하니 말이다.
수염과 부릅뜬 눈, 눈으로 쌓은 조그만 무덤, 영국 국기, 유행에 뒤처진 여자의 머리 같은 긴 갈기를 가진 조랑말들이 줄무늬 진 바위 사이를 나아가는 모습...... 그 죽음도 '마침표'였고, 여러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느낌표를 붙이고 스콧이 집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의 여백에 단정한 글씨로 짧은 글을 써넣은 여학생 세라도 '마침표'였다... 신은 한때의 일시적인 기분을 이용하는 연인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자신의 전설로 우리를 유혹하는 영웅처럼 음흉한 존재였다. p.316~317
이 작품은 인간 실존과 신의 관계를 깊이 고찰한 가톨릭 소설가이자, 격변과 혼란의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복합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의 장편소설이다.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은 단편소설집으로 처음 만났었다. 53편의 단편을 한 권으로 엮은, 무려 964페이지의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그 책은 두툼한 페이지만큼이나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은 <브라이턴 록>,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에 이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가톨릭 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특히나 기존의 작품들이 모두 3인칭 시점으로 쓰였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처음으로 1인칭 시점으로 쓰였고, 그린의 실제 연애 경험이 반영된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해 더욱 의미가 있다.
폐허가 된 전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결국 끝나버린 사랑과 잃어버린 연인을 기리는 애도의 기록이면서,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를 넘어서 신앙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로 도덕과 신앙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브라이턴 록>에 이어 종교적 고뇌와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사랑의 종말> 역시 그레이엄 그린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레이엄 그린의 아름다운 걸작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