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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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그 모든 상념으로부터 물러나 공구창고 안의 시원한 새벽 그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곳에 있기로, 떠나지 않기로 했다. 갑자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추락하고 있는 것처럼, 발밑의 땅이 사라지고 행성의 중심부까지 떨어질 것처럼. 기쁨인가, 공포인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피가 뼈와 근육에 똑같은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떠나지 않을 것이다.      p.28

 

40년이라는 세월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이다. 행성 콜로니 3245.12는 지구를 떠나 인류가 40년째 거주하고 있는 행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콜로니 거주를 관리하는 컴퍼니가 사업권 상실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이주 계획을 발표한다. 컴퍼니 대리인들은 주민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것이 제공될 거라고 말했지만, 이주 경험이 있는 오필리아는 짐을 가져가려면 이주 준비에 30일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콜로니 정착 초기부터 이곳에서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것이다. 컴퍼니는 이제 칠순인 오필리아가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주 비용을 개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직업 없이 정원과 집을 가꾸고 요리를 거의 도맡아 한다는 이유로 쓸모없다는 취급을 당하면서 오필리아는 분노가 치민다.

 

이미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그녀의 다짐은 굳건해졌고, 아들 부부에게 말한다. 내가 남으면 너희가 비용을 부담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난 극저온 탱크에서 견디지 못할 거라고. 여기 남아 있겠다고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 어떤 요구도, 충고도, 폭력도 가해지지 않는 혼자만의 세상, 자유를 꿈꾼다. 결국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 남게 된 오필리아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행성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방해도 없고 성난 목소리도 없고, 그것은 그만두고 이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살아남은 생명체가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00여 개체의 아주 큰 갈색 동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동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버려진 마을에서 먹을 만큼만 정원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려던 오필리아의 계획은 그렇게 달라진다.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괴동물들이 대체 왜 오필리아에게 접근한 것일까. 혼자 남겨진 70대 노인은 그들과 어떻게 공존하게 될까.

 

 

 

외로움이 돌처럼 무겁게 오필리아를 내리눌렀다. 억지로 정원을 돌보고 억지로 소와 양을 살피러 가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텼다. 정신을 차려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얼어붙어 입을 헤벌린 채 들릴 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들과 며느리와 그가 거의 평생 동안 알고 지낸 이들이 떠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으면서. 그때 그는 자유롭다고 느꼈다... 이제 오필리아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좁은 장소에 갇힌 것 같았다.     p.106

 

정말 오랜 만에 출간된 엘리자베스 문의 신작이다. 그녀의 작품은 <어둠의 속도>이 2007년에 국내에 출간된 이후로 소식이 없었는데, 이번에 개정판과 신작이 함께 출간되어 너무 반가웠다. 네뷸러 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어둠의 속도>만큼이나 이 작품 역시 세계 주요 SF문학상인 로커스상, 휴고상,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 최종 후보작으로 오르며 화제였던 작품이다. 특히나 '외계인과 인간 여성 노인'이라는 존재의 만남이라는 설정으로 70대 노인의 행성 생존기를 그리고 있어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은 그 동안 장애를 '다름'이 아니라 '결핍'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가 정한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 왔다. <어둠의 속도>에서 자폐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섬세하게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잔류 인구>에서는 70대 여성 노인을 등장시켜 사회가 정한 기준과 시선을 속시원하게 부숴 버린다. 보통 외계생명체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첫 만남의 대상을 노인 여성으로 설정하는 경우란 흔치 않다. 그것도 사회로부터 가치없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존재로 말이다. 오필리아는 과학자나 인류학자들도 어려워했을 일을 거뜬해 해낸다.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을 돌봄능력과 인내심등을 활용해 배려하고, 인내하며 소통하고, 더 나아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오필리아가 다시 찾아온 사람들과 외계 생명체들과의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어리석은 그들에게 현명한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 굉장히 뭉클했다. 무지로 인해 외계생명체들을 공격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그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는 모습은 70대 노인이 아니라 마치 여전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만나본 적 없던, 아주 특별한 SF소설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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