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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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고에 그가 어떤 문장들을 썼었는지, 지금은 바다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내 기억 속에는 없다. 다만 기억나는 건, 내가 십 대 초반에 문학을 발견하며 느꼈던,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전문 교육을 받으며 서서히 허물어져버린 열정을 다시 느끼면서 내가 그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흔치 않은 문학적 재능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고, 동료 수강생의 탁월함에 설령 내가 어떤 질투를 느꼈을지는 몰라도 그런 질투의 감정은 빌리의 겸손함과 관대함 때문에 누그러져 있었다.     p.38

 

1996년 뉴욕의 8월, '나'는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의 문예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가을학기 소설 워크숍에서 그 동안 써두었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었던 원고 <교열팀장>을 제출했고, 동료 수강생들의 악평에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그때 원고를 신중히 검토한 끝에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빌리였고, '나'를 비롯한 수강생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수업이 끝난다. '나'는 빌리의 원고를 읽으면서 그의 재능을 단 번에 알아 차린다. 그의 원고는 완전히 실패해버린 자신의 장편소설이 그런 모습이었으면 했던 바로 그 소설이었던 것이다. 빌리의 문학적 재능에 동경과 매혹을 느낀 '나'는 자신과 함께 지내지 않겠느냐고 그에게 제안을 한다.

 

'나'는 학비며, 생활비를 아버지가 내주고 있었고, 고모의 넓은 아파트에 홀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빌리는 바텐더 일을 하며 바의 지하실에 임시로 묵고 있는 처지였기에, 집세 대신 청소나 요리를 좀 하는 걸로 두 사람은 함께 지내게 된다. 두 사람은 집에서 많이 읽고 많이 썼고, 서로의 작품을 고쳐주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그들의 관계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처럼 상호보완적인 문학적 우정으로 발전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실 성장 배경, 계급, 정치적 가치관 등 같은 점보다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 더 많았다. 게다가 별다른 문학적 재능이 없어 보이는 '나'에 비해 빌리는 동료들과 교수들까지 모두 인정하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렇게 하나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게 된 소설가 지망생 두 명의 아슬아슬한 우정은 결국 어디로 향하게 될까.

 

 

 

...사실 나는 일 년 내내 억누르고 있던 것을 나 자신에게 털어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빌리가 내 안에서 다른 누구도 움직이게 한 적 없는 무언가를, 깔끔하게 정의된 범주에는 들어맞지 않는 무언가, 내가 명료하게 표현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무언가를 건드려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비록 이런 각각의 경험은, 누구나의 외로움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특정 범주에 넣기 불가능한 독특한 것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라고 - 타인의 경계가 그려내는 특별한 윤곽선은 우리 자신의 그것과 충돌하고, 남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을 커다란 구멍을 남긴다 - 지금의 나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p.286

 

문학을 사랑하고,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는 공통점 만으로도 영혼의 단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처럼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며, 나를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이 작품은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젊은 소설가 지망생들의 관계를 통해 친밀감과 동경, 분노와 질투, 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 사이를 오가며 섬세하고 복잡한 이들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재능과 평범함을 배경으로 두고, 맹목적인 숭배나 무분별한 시기가 아니라 좀 더 다층적인 감정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대단히 흥미로웠다.

 

사실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연수 작가의 추천평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가 추천한 작품 중에 미처 몰랐던 작품을 알게 되거나, 숨겨져 있던 작품의 재발견을 하게 된 적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 언론의 어떤 극찬보다도 믿고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김연수 작가의 추천평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뭔가 벌어질 듯한 플롯, 생생한 캐릭터, 눈에 보이는 묘사, 팽팽하게 이어지는 대화 등 소설 문장의 모범 답안이랄 수 있는 문장들로 이해하게 되는 평범한 소설가 지망생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기대감을 안고 만나본 이 작품은 멋진 추천평 만큼이나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소설이었다. 극중 '나'가 빌리에게 제일 두려운 게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전적으로, 필연적으로 빌리에게, 혹은 빌리의 외로움에게 매혹된다. 왜냐하면 그가 나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지만 서로의 영혼이 닮았다는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바로 그러한 슬픔과 쓸쓸함이 짙게 내재되어 있다. 한때 우리를 스쳐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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