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수집노트 - a bodyboarder’s notebook
이우일 지음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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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위험하고 신경 쓸 일이 많음에도 파도타기에 중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도타기는 어린 시절 해 질 녘까지 “한 번만 더!”를 외치며 타던 미끄럼틀과 비슷하다. 경사면을 주르륵 타고 내려올 때의 그 즐거움을 안다면 누구나 중독될 수밖에 없다. 파도타기는 스키, 스케이트보드, 썰매, 스노보드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파도타기가 그런 탈것들과 다른 점이라면 타고 내리는 경사면이 물로 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p.58

 

몇 년 전에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로 날아간 이우일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에세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일 년 중 절반이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우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에서 이 년 동안 살면서 그들이 겪은 현지의 소소한 일상들이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뭔가에 꽂히면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이우일의 요즘 관심사는 파도타기이다. 대화의 소재부터 심지어 꿈에도 파도가 나올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스포츠를 즐긴 적이 없다. 그렇다면, 몸치에 온갖 운동에 대한 트라우마를 한가득 가지고 있는 그가 어떻게 파도타기에 빠져들게 된 걸까.

 

 

이 책은 하와이에서 시작해, 강원 양양 남애 3리, 부산 송정, 제주 중문 색달 해변 등 파도를 좇아 바다 곳곳을 다닌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에세이와 일러스트, 그리고 진솔한 파도수집노트(일기)와 촌철살인의 4단 만화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잘 펴지고 튼튼한 사철누드 제본이라 보기도 편하다. 오십 평생을 방구석 생활자로 살던 만화가 이우일이 오직 파도타기를 위해 30년째 고수하던 소위 장롱면허를 탈피해 운전도 시작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푹 빠져 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부딪히고, 겪으면서 쓴 서핑 에세이라 생생하고, 유쾌하고, 시원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취향이 마이너한 건 죄가 아니다. 다만 그 취향의 결과물이 인기가 없는 건 알아서 감수해야 한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 시작한 짓이니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만약 운이 좋아 그 취향이 더 많은 사람의 방향과 맞아 떨어져 같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크게 가슴 아파할 건 없다.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새벽부터 일어나 혼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거다.      p.155

 

이우일에 따르면 어떤 보드를 사용하는지와 상관없이 파도타기는 일종의 '시합'처럼 할 수도 있고, 홀로 걷는 '산책'처럼 할 수도 있다. 모든 건 타는 이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시작할 때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풍광을 즐기며 파도를 타자고 마음먹지만, 바다 위에 떠 있다 보면 곧 다른 서퍼들과 경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아내의 눈에는 그런 남편이 바보처럼 보인다고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다 위에서 단지 파도를 먼저 타겠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니 말이다. 그래서 바다 위에서 아내는 '산책'을 하고 자신은 일종의 '경쟁'을 한다는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이런 것에서도 각자의 성격과 가치관이 드러나는 구나 싶어서 재미있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누가 진정한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서핑과 보디보드(부기보드) 타기는 사실 다르지 않지만, 대부분 보디보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여러 보드의 종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말이다. 오십이 넘어 시작한 부기보더의 좌충우돌 일상을 읽으면서 새삼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익숙한 즐거움을 누리며 탈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기술에 도전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누구나 어릴 때는 뭐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고, 세상을 많이 겪을 수록 우리는 익숙한 즐거움에 안주하게 된다. 실패보다는 안전을, 도전보다는 익숙함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생각해보라. 내게 남겨진 나날 중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을.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좀 더 늙고 지친 나일 것이다. 그러니, 저자처럼 조금 무섭고 겁이 나더라도 뭔가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용기를 내 조금 더 가까이 가보자는 것이다. 몸치 만화가의 유쾌한 늦바람처럼 그 도전은 우리를 치유하고 전보다 좀 더 나은 영혼으로 만들어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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