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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928/pimg_7694311453131253.jpeg)
기사를 읽고 아연했다. 이런 어이없는 이유가 범행 동기란 말인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이유를 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기가 어이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에 걸린 것은 '직접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진정성 있는 태도라는 말을 듣고'라는 부분이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까. p.189
해안 도로변 차 안에서 흉기에 찔린 사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정의로운 국선 변호인으로 명망이 높던 변호사로 주변 사람들 모두 그에게 원한을 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살해 동기가 전혀 짐작되지 않아 단서 하나 못 잡고 수사가 미궁에 빠질 뻔 했지만, 사건은 백여 페이지도 되기 전에 갑작스럽게 해결이 되어 버린다. 한 남자가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33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 사건의 진범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며 논란을 일으킨다. 이미 공소시효는 만료되었지만, 당시 체포되었던 용의자가 결백을 증명하고자 유치장에서 자살을 했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3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 두 개의 살인 사건에 대한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요 플롯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경찰이 아니라, 가해자의 아들과 피해자의 딸이라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진상을 납득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런 행동을 했을 리 없다, 는 정도를 넘어서 평소의 가치관과 말투로 미루어 봤을 때도 자신의 아버지가 했을 법한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한다. 분명 또 다른 진실이 있다고, 그것을 꼭 밝혀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경찰 수사는 이미 끝났다는 식이고, 검찰이나 변호인은 오로지 재판 준비에만 골몰하고 있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쓸데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로 적의 입장이 되어야 할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의 목적이 같았기에, 그들은 한 팀이 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선뜻 이해하기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극중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누구라도 각자의 사정에 감정 이입이 된다. 그렇게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928/pimg_7694311453131244.jpeg)
하지만 나도 똑같은 눈빛인지 모른다, 라고 미레이는 생각했다. 범인이 자백을 했고 이제 사건의 진상은 다 밝혀졌다고 모두들 말한다. 그리고 그 진상을 바탕으로 재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상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이 세상에 어머니와 자신뿐이라고 미레이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또 있었다. 가해자의 가족도 역시 이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p.274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35주년을 맞아 올해 4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560페이지의 두툼한 두께의 작품을 단 몇 개월 만에 번역본으로 만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번 신작 역시 가독성 뛰어난 페이지 터너다운 면모를 뽐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의 작품이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그 작품을 읽었던 것이 무려 15년 전이니 그 시간 동안 작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나 서로 적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이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설정과 원죄와 속죄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통찰이 있었기에 후반부의 묵직한 감정이 더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작가 생활 3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에 걸 맞는 수준을 보여주는, 히가시노 게이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모두 선사해주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은 색다른 소재와 반전으로 추리 소설로서의 매력도 크지만, 그 속에 항상 '인간'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 있어 긴 여운을 남긴다. 사실 대부분의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나 과거 같은 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관심이 없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유품을 정리하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거나, 이 작품 속 사건처럼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넘어갔을 일들을 의도와 상관없이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를 숱하게 감동시키고, 울고, 웃게 만들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35년이 담긴 작품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을 만나 보자. 선과 악, 죄와 벌, 정의와 공정, 그리고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