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평범한 인간으로, 망가지지 않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게는 나 자신의 인생 외에 다른 경험은 없다. 밤에 뒤숭숭한 꿈에서 깨면, 나는 라스에게 달라붙어 오른팔로 그의 등을 감고 틀림없이 평화로울 그의 꿈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라스의 무해한 꿈이 내게 흘러들어오도록 그에게 마음을 열려고 노력했다. 잠든 그의 몸에서 꿈을 빨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들어갈 길은 없었다. 나는 내 몸의 포로였다.       p.70

 

아빠가 다섯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몇 주 동안, 형제자매들은 가족의 재산인 발러의 휴가용 오두막을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가를 놓고 격한 분쟁에 휩싸인 상태였다. 유산 상속을 두고 살인도 일어나는 세상이니, 이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여동생 둘과 오빠가 대립 중이었고, 엄마는 약물을 과용해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회복 중이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표본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식들은 그리 크게 놀라지 않는다. 엄마가 사고를 내는 것은 첫 시도가 아니었고, 나는 20여 년 전부터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아 왔었기 때문이다.

 

잡지 편집자이자 연극 비평가인 베르기요트는 집안의 맏딸로 이제 5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로부터 결코 겪어서는 안 될 일을 당했다. 다섯 살부터 일곱 살 사이, 반복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 그녀는 엄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엄마는 그녀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그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여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렇게 가족의 명예를 위협한 추방자로 살아 왔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고 견뎌 냈다.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이제 엄마와 아빠에 대한 공포는 잦아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기요트는 큰딸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이 아버지가 혹시 밤에 아이 침실에 드나들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악몽이 트라우마가 되어 여전히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인간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보통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누가 더 많이 고통받았나 논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학대당한 아이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남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감정적 내면은 파괴된다. 학대자의 사고방식과 학대 방식을 물려받는 일도 흔하다. 그것이야말로 학대의 가장 고약한 유산이다. 학대는 학대당한 사람을 파괴하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을 어렵게 한다. 고통을 누군가에게, 특히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면 강한 노력이 필요하다.     p.268

 

데뷔 초기부터 여성의 역할과 직업, 섹슈얼리티, 평등과 자유 앞에 선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현대 여성을 묘사해 온 북유럽 여성문학의 선두주자이자 노르웨이의 인기 작가 비그디스 요르트의 작품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소설이다.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족의 유산 상속 싸움이 주요 플롯이지만, 그 이면에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은 모두를 수치로 가득 채웠던, 그래서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가족의 비밀이다. 아빠는 젊은 시절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했고, 평생 그 행위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일곱 살이 되어 딸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된 뒤로는 손도 대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고, 관계를 끊었다. 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며 지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일은 잊히겠지. 하지만 어떤 일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그대로 박제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런 아버지의 잘못을 모른 척 했던 가족들이다. 베르기요트의 상처는 가족들로부터 무시 당했고,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지금 유산 상속 문제로 인해 마주하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용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망각에 바다에 던져 버릴 수도 없다. 유년의 트라우마와 상처 속에서 투쟁하는 한 여성의 고군분투가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