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쁜 것에 매혹되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망 중 한 가지라던데, 우리가 유령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귀신 들린 집,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저주, 누군가 억울하게 죽어서 원한을 품고 나타나 복수를 하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계속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들, '실재하지 않지만 언젠가 진짜 벌어졌을 것만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것에 끌리는 마음 때문인지,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유령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whatever walked there, walked alone    - Shirley Jackson

 

초등학교 시절 다니던 학원 건물에 버려둔 지하 공간이 있었다. 미술 용품이며 각종 물건들이 여기 저기 쌓여 있었지만,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고 원래 의도가 뭐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방치된 곳이었다. 그곳을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원 수업이 끝나고 남자 아이들 몇 명과 여자 아이들 몇 명이 거기서 귀신 놀이를 하곤 했다. 귀신 놀이라고 해도 별 건 없었다. 숨바꼭질처럼 한 명이 술래가 되어 나머지 아이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는 거였는데, 그 커다란 공간에서 불을 끈 채로 했기에 귀신 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오싹했지만 스릴 있었고, 무서웠지만 재미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기껏해야 똑같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해를 끼칠 뿐이죠. 나는 살아 있는 것들은 무서워하지 않아요. 살아 있는 것들이 남긴 것을 두려워하죠. 그건 무엇일까요. 원한, 고통, 절망. 그런 것들일까요. 무엇에 원한이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죠. 그렇기에 두렵죠. 실체를 알 수 없으니까요. 자신이 왜 원한을 가졌는지조차 잊어버린 존재들. 그래서 오직 원한만 기억하는 존재들. 지우고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   p.141~142

 

아이들만의 비밀 놀이가 끝이 나 버린 것은 그러다 한 명이 다쳤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물건들이 곳곳에 쌓여 있었고, 어두운 상태로 움직이는 거였으니 다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지하실의 문은 굳게 닫혀버렸고, 아이들은 한 동안 다친 아이를 원망했다. 그러다 놀이에서 그 아이를 배제하기 시작했고, 왕따까지는 아니었지만 한 동안 그 아이는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나는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어쨌든 쟤 때문에 우리의 비밀스러운 놀이가 끝나버렸으니까. 싶은 마음에 굳이 그 상황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그런 마음들이 일종의 '악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go away, Eleanor, we don't want you any more, not in our Hill House, go away, Eleanor, you can't stay here    - Shirley Jackson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산 것이 수십 년인데,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이 문득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작품 때문이다. 강화길과 유령이라니, 귀신 들린 호텔이라니.. 그 조합만으로도 빛을 발했던 기대치를 모두 만족시켜주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은 이상하게도 내 속에 있던 기억들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사고는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에 불과했지만, 사실 위험천만했던 그곳에서는 언제든 누구라도 다칠 수 있었다는 걸 우리 모두 은연중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만약 그때 그 아이가 억울해했다면, 그래서 너희들의 악의를 돌려주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어땠을까.

 

 

셜리, 당신이 말했지. 그 자매들에 대해서. 한이 풀릴 때까지 수령들을 죽이고 죽인 그 분노에 대해서 말이야. 그럼 죽어나간 수령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자매들의 이야기가 아니야. 누군가의 원한 때문에 계속 죽어나간 수십 명 인간들의 이야기야. 그 원혼들이 스며들어 있는 불경한 집에 관한 이야기야! 나는 이 건물에 스며들어 있는 무수한 원한, 그리고 살면서 겪은 지독한 원한들이 내 안에서 괴기스럽게 부푸는 것을 느꼈다.      p.237

 

안진이라는 도시의 어떤 소문난 유치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니꼴라 유치원>을 쓰고 있는 소설가 '나'는 언젠가부터 매일 밤 악몽을 꿨고, 밥도 거의 먹지 못했다. 뭘 좀 쓰겠다는 마음을 먹기만 하면 속이 뒤집히고 식은땀이 났으며, 너무도 불안했다. 사실 '나'는 <니꼴라 유치원>을 '원한과 증오, 악의로 들끓는 이야기'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 시절 속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곳이었던 '니꼴라 유치원'을 떠올려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 훼방을 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친구인 '진'으로 부터 자신의 소설 <니꼴라 유치원>의 풍경이 인천에 있는 대불호텔의 빈터와 주변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곳으로 향한 '나'는 회색 쇠창살과 그 안의 황량한 빈 터, 폐허가 된 대불호텔의 흔적을 보다가 녹색 재킷을 입고 있는 여자 환영을 보게 된다. 그리고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I am the captain of my fat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 Shirley Jackson

 

'셜리 잭슨이 대불 호텔에 왔다가 <힐 하우스의 유령>을 썼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기에, 실제로 셜리 잭슨이 이야기에 등장한다. 작품의 배경이 1950년대가 된 것도, <힐 하우스의 유령>이 1959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을 배경으로 '대불호텔'에 모인 네 사람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들과 수많은 악의들로 점철되어 있다. '악의'라는 감정이 무서운 것은 시작된 사람으로부터 불처럼 번져가는 마음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원한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쏟아 붓기 위해 만들어진 마음이라면, 그로 인해 만들어진 악의가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너도 어디 한 번 당해봐, 내가 받은 것만큼 되갚아 주겠어, 라는 마음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장화 홍련 속에서 자매들의 원한이 풀릴 때까지 사람들이 계속 죽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원한은 그런 것이다. 풀리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 마음. 대불 호텔에서 셜리는 바로 그런 원한을 느끼고 매일 밤 악몽을 꾼다. 왜 이 건물은 사람들의 미움을, 증오를 집어삼키고, 서로를 배반하라고 부추기는 걸까.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유령의 집’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지만, 사실 생각보다 오싹하거나 무섭지는 않다. 대신 외롭고, 쓸쓸한 감정들이 페이지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강화길식 고딕 호러의 장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