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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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녀의 호기심과 망설임을 알고 있다는 듯, 클레어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있잖아, 르네. 난 늘 궁금했어. 더 많은 흑인 여자애들, 너나 마거릿 해머, 에스터 도슨과 같은 애들이 왜 절대로 백인 행세를 안 하는지 말이야. 그건 정말 엄청나게 쉬운 일이거든. 그럴 수 있는 유형에 속할 경우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되거든.”
"배경은 어떻게 하고? 내 말은, 가족 말이야. 네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 치고 다른 사람들이 두 팔을 벌려 널 받아들이기만 바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p.47

 

백인 피부를 지닌 흑인 여성 아이린과 클레어는 어린 시절 친구로 우연히 십이 년 만에 뉴욕의 백인 전용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흑인 남성과 결혼해 흑인복지연맹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 비해, 클레어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클레어는 타인의 욕망과 편의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던 아이였다. 그 단호하고 집요한 면이 결국에는 가난한 고아 신분에서 상류층에 편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백인 남편이 극심한 인종주의자라는 것이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백인 행세를 하면서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의 완벽하게 평화로운 삶에 침입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적극적인 연락으로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갔고, 어느 날 아이린은 클레어의 남편 잭을 만나게 된다. 그는 아내의 친구들 앞에서 검둥이들을 싫어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고, 아이린은 끓어오르는 노여움과 분노를 감당하려고 애써야 했다. 아이린은 자신의 균형잡힌 일상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클레어는 자신의 원래 소속인 흑인 지역 할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점점 더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불안하다. 흑인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남편과 살면서 혹시라도 태어나는 아이에게 검은 피부가 나타날까 걱정하고,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살아남아서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지."
"말도 안 돼! 생물학적 일반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는 없어요."     p.110

 

이 작품은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 대표 작가, 넬라 라슨의 작품으로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동명의 영화로 개봉했고, 넷플릭스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제목인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당신이 흑인이라면,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피부색이 밝다면 어떨까. 그래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백인 행세를 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흑과 백이라는 인종 간의 경계에 서 있다면, 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여기, 익숙하고 정다운 것들과 모두 단절한 채 위태로운 승부를 거는 여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가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는 여성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백인 피부를 지닌 흑인 여성이다.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이용할 때, 그저 상대가 자신을 백인이라 착각하고 보여주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정도의 방식으로 패싱을 하는 것과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흑인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숨이 막혔던 여성은 어느 날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되고, 다시 흑인 지역 할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두 여성의 욕망과 불안이 점차 쌓여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파국으로 치닫게 될 때 짧은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아름답고 섬세하며 매혹적인 작품이다. 경계를 넘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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