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그러니까 이 편지 속에서 나는 너의 것이야. 가든의 표적도, 네 임무의 일부도 아닌, 오로지, 너의 것. 나는 다른 방식으로도 너의 것이야. 너의 기척을 찾아 세상을 주시하는 동안, 동물의 내장을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처럼 상관도 없는 것에서 너와 연관된 점을 찾는 동안, 너의 것이야. 편지를 부칠 방법과 이유와 기회를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너의 것이고. 네가 적은 말들을 순서에 따라, 소리에 따라, 냄새에 따라, 맛에 따라 음미하는 동안, 그 기억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너무 바래지 않도록 보살피는 동안, 나는 너의 것이야.     p.118

 

시간의 가닥을 따라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오랫동안 시간 전쟁을 벌여온 두 종족이 있다. 최정예요원 '레드'는 양측 군대가 모두 죽어 널브러져 있는 전장 한가운데, 초토가 된 대지 위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별 사이를 오가던 전함의 잔해 사이로 쌓인 주검들, 성공한 작전의 결과로 뿌려진 피와 흙먼지로 가득한 곳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등장한 것이다. 크림색 편지지에 써진 것은 '읽기 전에 태워 버릴 것'이라는 문구였다. 그 편지는 당연히 함정처럼 보였지만, 이런 도전장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레드는 편지를 읽는다. 그리고 두 적대 진영의 비밀 요원인 '레드'와 '블루' 사이에 편지 왕래가 시작된다.

 

이들의 편지는 단 한 번만 읽도록, 다 읽으면 없어져 버리도록 만들어졌다. 견제와 조롱으로 시작되었던 편지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오며 어느 순간 시간 전쟁의 변곡점이 된다. '시간의 실 가닥'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전쟁을 벌이고, 세계의 한복판에 금이 가면서 부서지기 시작하면 다시 미래의 '시간 타래'를 향해 움직이며 벌어지는 시간 전쟁은 각자에게 모두 필사적인 승리를 요구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들의 비밀스러운 관계는 외부의 상황과는 별개로 흘러간다. 마치 그들 두 사람만 완전히 또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편지가 자아낸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감정 교류는 굉장히 로맨틱하면서도 매혹적이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주요 플롯이 아날로그 방식인 서신 교환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게다가 편지를 시간 여행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는데, 현재 편지를 쓰는 이의 대상이 미래의 수신인이고, 그렇게 미래에 전해진 것은 지나간 과거에 속하는 존재이기도 하니 말이다.

 

 

 

레드는 생각한다. 나도 참, 대단한 시간 여행자로군. 블루는 이런 수법에 속지 않을 것이다. 레드의 말을 따를 것이다. 그녀는 편지를 받았다. 이해할 것이다. 해야 한다. 그들이 지닌 유일한 미래는 따로 함께인 시간이다. 둘은 너무도 오랫동안 서로를 모른 채 살았고, 시간을 누비며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따로였고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빚었고 그러는 동안 서로에 의해 모습이 빚어졌다. 그러니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왜 안 된단 말인가? 아플 것이다. 그들은 전에도 아팠던 적이 있다. 상대의 목숨을 구하려고.    p.212

 

 

캐나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아말 엘모흐타르와 미국의 소설가 맥스 글래드스턴은 SF 팬 모임에서 만나 손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그러다 서신 왕래 자체를 소설로 발전시켜 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 작품을 함께 집필하게 된다. 그리하여 두 작가는 '레드'와 '블루'라는 소설 속 각각의 주인공을 맡아 서신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 후, 두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소설을 완성해냈다. 이 작품은 전미 베스트셀러에, 휴고상 및 네뷸러상, 로커스상 등의 SF상을 휩쓸고 영국 SF협회에서 주는 BSFA상, 캐나다 SF협회에서 주는 오로라상을 석권하며 주목받았다. 할리우드에서 TV 드라마로 준비 중이라고 하니 영상화되는 버전은 또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놀라운 SF적 상상력과 현란한 필담을 기본으로 그려지는 작품이라 번역도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종이 동물원>으로 제13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장성주 역자가 1년여에 이르는 긴 번역 작업을 거쳐 완성했으니 믿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표지 디자인도 너무나 근사한데 겉 표지를 벗겨내면 보이는 속 표지 디자인과, 책장을 넘기면 만날 수 있는 내지에 이르기까지 '레드'와 '블루' 컬러의  색감과 조화가 아름답다. 이러한 디자인은 책을 모두 다 읽고 나면 더 의미가 있어지니,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반드시 속표지와 내지 이미지를 다시 한번 되짚어 봐야 한다. 이들이 시간 전쟁을 벌이는 무대가 역사 속의 다채로운 시공간이라는 점도 매력적이고, 무수한 시간의 가닥을 넘어서 비밀스럽게 이어지는 편지 교환이 서로에 대한 감정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도 설레이는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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